[오늘도 나이쓰] 21
설 연휴 시작 일주일 전, 주말. 아내의 지인들 4인방이 우리 집에 모여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전주 금토일. 사흘간에 걸친 분리수거의 결과였다. 미니멀, 미니멀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냉큼 따라 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연예인 누가 누가 해도, 친구의 이웃의 친구네 윗집이 멋들어지게 변화시켰다 해도 내 이야기가 될 만큼 와닿지 못한다. 쉴 시간도 없고, 그냥 귀찮으니까. 그대로여도 당장 큰 문제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경우는 다르다. 보통 나의 (거의 모든) 삶의 기준은 내 마음속에 들어있는 친구 또는 지인의 기준과 비슷하거나 또는 살짝 높게 설정되어 있다. 너무 높아 넘사벽이거나 너무 낮아 수준이 안 맞는가 싶으면 정서적,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느끼게 마련일 테니까. 내가 마음대로 정한 그 기준의 기준인 그들의 거침없는 도전과 변신은 쉬지 못해도, 여전히 귀찮아도 당장 움직일 힘이 어디선가 용솟음치게 만든다.
새 집으로 입주해 모든 게 정갈하게 새것으로 바뀐 오랜 친구의 집에 다녀오면 버리고 버린 우리 집도 너저분하게 꽉 들어차 보인다. 괜히 잘 있던 우리 집, 물건들에 미운털이 박혀 버린다. 결국 털어낼 수밖에 없다. 사흘동안 그렇게 거실의 (거의) 모든 걸 버렸다. 십오 년 넘은 6인용 쇼파도 십 년 넘은 이케아 테이블도 그보다 더 오래된 4인용 원목 식탁도. 당연히 새것을 사지 않는다는 전제로.
그 영향이 날갯짓이 되어 이 집 저 집 날아다니고 있는가 보다. 아내의 말로는 4인방 모두 지금 거실 되찾기 운동 중이란다. '버리니까 너무 좋아'. 아내가 캠페이너 campaginer가 되어버린 거였다. 설 연휴 동안 순자씨의 눈빛도 그런 의미로 유난히 반짝였다. 스물몇 평 아파트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사시면서 이고 지고 산 것들이 너무 많다, 고 드립 커피 한모금마다 내뱉으신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내가 먼저 외쳤다. '어머니, 우리랑 같이 해요. 이번 기회에'. 그렇게 약속한 경호씨-순자씨네 아파트 거실 되찾기 캠페인. 우리 집 거실에서 시작된, 아니 친구네 새집 거실에서 날아든 나비가 이제 경호씨-순자씨 거실로 날아들었다. 눈이 비가 되고 얼음이 녹아 물이 된다는 경칩을 며칠 앞둔 지난 주말에. 새벽에 잠깐 사나웠던 겨울 끝바람도 이미 봄날인 듯 산들해진 맑은 하늘 아래.
'아버지, 종량제 큰 봉투 사다 놓은 게 몇 개 있으세요?', '어, 2개나 있어. 그거면 넉넉해. 그냥 올라오게'. 경호씨 목소리는 이미 달구어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와 올라갔더니 급하게 신난 순자씨는 경호씨를 설득해 이미 분리수거를 시작 중이었다. 순자씨는 꺼내놓고 경호씨는 14층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가만 보니 경호씨는 적당히 지저분한 것들을 버리는 정도로 생각이 먼저 정리된 듯했다.
버릴까 말까를 가르는 기준이 여전히 애매했다. '언젠가는', '다 돈인데', '그게 어떤 건데'하면서. 순자씨는 눈빛으로 나와 아내에게 연신 도움을 구했다. '십 년 전에 얻어 온 쇼파야', '다리가 다 갈라졌어'하면서. 그런데 경호씨는 달랐나 보다. 여전히 '멀쩡한' 쇼파였고, 조금만 손을 보면 되는 '아까운' 가구였다. 구분이 되어 있어도 시간이 걸릴 일에 마음이 맞지 않았나 보다.
그때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역시 순자씨는 지혜롭다. 콩가루위에 들깨를 솔솔 뿌린 봄동 찜, 미나리굴전, 코다리찜으로 먼저 밥상을 차렸다. 아침 일찍 일꾼(?)들 먹일 정갈한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신 거였다. 전날 근무하고 새벽에 퇴근한 경호씨가 두어 시간 마른 잠을 청하는 동안. '먹고 하자, 먹고 해. 그래야 크고 묵직한 것도 버리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일을 할 수 있지. 얼른하고 너희도 내려가 쉬어야지.'
(순자씨의 지략대로) 당연히 밥 먹는 동안 마음 약한, 아내한테 약한 경호씨 마음이 우리 입을 거쳐 대대적인 분리 작업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거실에 비해 꽤나 컸던 쇼파도, 작은방에 덩그러니 역할을 잃고 잡동사니가 쌓여가던 장롱도, 용도가 애매한 수납장도, 둘이 사는 집 여기저기에 있던 9개가 넘는 원목 의자들도 모두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오후 4시가 다 되어 쭈꾸미 볶음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대용량 종량제봉투 2개면 충분하다던 경호씨의 야무진 손에서 빵빵한 솜이불처럼 담겨 무려 7개가 나의 캠핑용 캐리어에 실려 버려졌다. 그러는 사이 두분이 쓰시던 5인용 쇼파도 하나하나 분해해서 실려 내려갔다. 유리문이 베란다로 들이친 태양에 불투명하게 변한 거실 수납장 2개, 갈라진 다리가 수납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원목탁자 포함 의자, 탁자만 9개를 실어 내렸다.
그러는 사이. 아내는 순자씨 옆에서 주방 삼단 싱크대 문을 죄다 열고 접시, 컵, 냄비류 등을 일일이 용도 파악을 하는 중이었다. 순자씨는 '아고 그게 거기 있었구마. 그런데 안 써, 이제는 못써, 색깔도 변했어'하면서 쿵쿵 짝 쿵짝하면서 아내의 '버려요'라는 제안으로 합리적 근거를 확보한 듯 경쾌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막내 고모가 보내온 사과상자를 3번 채울 정도로 식기류가 쏟아져 나왔다. 그룻만 보면 오백 년 대대로 물려받은 종갓집 부엌이 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물몇 평 집안 곳곳에 있는 화분은 마블도 몇 개 있었지만 거의 도자기여서 무거웠다. 다육이, 야자수, 금전수, 여인초, 산세베리아, 선인장류, 해피트리, 행운목, 뱅갈고무나무, 인삼벤자민, 황금죽... 심지어는 옹기에 새순을 띄어다 오랫동안 피운 옹기 화분도 여러 개. 그렇게 크고 작은 화분이 41개(경호씨 말씀으로는 많을 때는 57개였는게 그나마 줄인 거란다. 오랜 친구한테 마음먹고 슬쩍 일러주는 듯 삐죽거리는 입술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가지고 내려간 식기류, 화분들은 분리수거하는 곳 뒤쪽 화단아래 종류별로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경호씨가 미리 그날 근무자분과 이야기를 나눈 것대로. 특히, 대형 종량제 봉투가 서너 개 버리는 사이 서너 번에 걸쳐 내려다 놓는 화분들은 다시 가지고 내려오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옹기에 담긴 인삼벤자민에다 아내가 써서 붙인 '화분 나눔' 안내 덕분이었다. 벼룩시장 열린 듯 여섯, 일곱의 주민들이 나를 둘러싸고 '예쁘다', '아깝다'를 연발하면서.
느닷없이 삼십 년이 넘는 경력의 식집사의 아들로 살아온 게 무한하게 뿌듯해지는 것 같았다. 철마다 화분을 구입한 게 아니라 원래 화분에서 새순을 받아 만든 화분들이 거의 다 여서 더욱 그랬나 보다. 새 집을 찾은 생명이 새 주인의 손에 들려 직접 옮겨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언제 따라 내려왔는지 내 뒤에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던 순자씨. 짠하면서도 속 시원함이 시선 가득 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 이야기가 묻어 있지 않은 물건이란 없으니까. 이고 지고 사는 건 물건이 아니라 그 이야기 들이니까. 시간은 지나갔지만 물건에 묻어 있는 나 그리고 우리가 가족이고 식구라는 걸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야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으니까.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물건들은 과거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의 인도 위 안쪽 골목입구쯤에 서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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