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늘도 같이 안녕해야 하는거 맞죠?
[오늘은 슈퍼데이, 오늘도 나이쓰데이]
오늘도 안녕하세요~ 라라크루님들^^. 오늘의 슈퍼크루 지담입니다.
어제 너나들이 작가님 한라산 윗세오름 탐방 글 덕분에 문득 저란 사람이 중간에 어디를 들렸다 지금 여기까지 왔나 싶어졌어요. 어느 전업 주부는 대 작가의 길을 선택하고, 어느 철학자는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은 완전체가 되고, 우리 대장님은 글을 쓰기 시작한 '마흔'에 결코 불혹 할 수 없었던 저는 혼자 맨몸으로 천왕봉을 올랐더랬어요. 뜨거운 여름날 새벽. 습식 사우나 한쪽 벽이 뻥 뚫린 듯한 표현못할 황홀경에 잠시 빠졌던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
좁은 산길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을 마주쳤죠. 한 서너 개 학급 정도의 인원이었어요. 벅찬 심장이 아직 뜨거울 때라 그랬을까요. 처음 마주친 아이들과 눈이 맞아 제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냥 원래 쓰던 그 흔한 인사말, 그거였죠. 산에 오른다는 건 자기 몸을 힘들게 만들어서 자기 마음한테 고백하게 만들려고 '작정'한 사람들만 하는 행동이니까요.
그런 후 글쎄 몇 분 동안 스쳐 내려오는 내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이라는 말을 수백 번은 들은 것 같아요. 분명 그날부터였죠. '안녕'이라는 그 흔한 말이, 늘상 쓰던 그 말이 제 가슴속에 콕 박혀 버렸는지. 해가 중천이었던 중산리 주차장에서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 때문에 차를 바로 출발 못 시켰는지.
저는 정선이 고향입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의 사래랍니다. 사래 그리고 사래와 이어진 뒷산, 앞산, 그 뒷산으로 어릴 적 뛰어다녔지요. 그러면서 산과 산 사이 계곡에서 고기 잡고 놀다 보니 자연스레 이어진 동강을 따라 그 옆 동네, 영월도 우리 동네처럼 놀러 다니고, 강가에서 천렵도 꽤 여러 해 했습니다.
영월. 높은 산이 마치 펄럭이는 깃발처럼 둘러친 너른 들판을 지나 '안녕히, 안녕히 잘 넘어들 가시라'는 정말 고맙고, 사랑스럽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동네 이름입니다. 그래서 결혼하고도 얼마나 자주 영월, 정선으로 가족들과 여행을 다녔는지 몰라요. 수수부꾸미, 핸드메이드 만두, 메밀 전, 도토리묵을 사 먹느라. 그 덕에 우리 남매들은 일곱, 여덟 살 때부터 피자, 치킨보다는 '칼칼한' 이런 것들을 더 좋아했나 봅니다.
그렇게 새벽 천왕봉을 올랐다 파도처럼 출렁이는 푸른 깃발 사이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가슴에 다 담은 흥분으로 다시 4시간 운전해 집으로 돌아와 집청소, 분리수거는 물론 미루고 미루고 했던 베란다 페인트칠(십 년 동안 여러 교재를 만들어 내고, 코로나의 불안과 우울을 막춤으로, 글로, 사랑으로 달래고, 매일 새벽 서서 읽고 쓰는 곳으로 재탄생한 곳이랍니다)을 자정이 넘도록 다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분명 '안녕'이었지 싶어요.
어쩌면 먹고 사느라 왔다 갔다 하면서 습관적으로 던지듯 하는 인사말이 또 '안녕하세요'일지도 모르겠어요. 그것조차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세상일은 딱 두 가지이지 싶어요. '마음'을 담고 하냐, 안 하냐. 그러고 나서 보면, 안녕을 외치는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유, 친절, 염려, 배려, 진심, 관심, 안전 이런 감정들이 고스란히 다 투명하게 비치는 게 보여요.
웃음도 행복도 전염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집에 들고 날 때 누워있다, 졸다, 운동하다가도 그 몇십 초 잠깐 멈추고 문 앞으로 나와 서 있기만 해도 하루를, 자기 일을 마치고 다시 잘 돌아온 이들의 얼굴이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면 자동으로 팔 벌리고, 그 안으로 들어오고.
저는 (글속에서 만이라도)아버지를 경호 씨, 장인어른을 성환 씨, 엄마를 순자 씨, 장모님을 옥희 씨라고 불러요. 천왕봉 갔다 온 무렵이었지 싶어요. 마흔 조금 넘었던. 머쓱하게 인사면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몇 주 만에 뵌 경호 씨, 옥희 씨를 보는 데 그냥 안기고 싶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훨씬 더 진했던 날이에요.
그런데 길거리에서 잠깐 안은 그 품에서 '아, 나처럼 이분들도 그냥 자기로 태어나 갑자기 스물 하나에 나의 아빠가 되고, 이대로 살아도 좋을까 고민할 때 나의 장모님이 되었구나. 느닷없이 그 호칭뒤로 숨어들어 그 역할을 해 내느라 나보다 훨씬, 오래 더 험하게 몸 쓰고, 마음 졸이며 살으셨겠구나' 하는 마음이 갑자기 올라오는 거예요.
또 그때부터였나 봐요. 너무 자주 쓰고, 나눠서 신선하지도 않은 '안녕하세요'. 잘 살다, 잘 헤어지는 그 꽤나 긴듯하지만 지나고 보면 찰나같은 그 시간 동안에 이 한마디 밖에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서로 남는 게 없겠구나 다짐하게 된 게 말이에요. 여전히 피곤하면 성질부터 올라오고, 피곤 안 해도 내 것부터 챙기는 남편, 아빠, 아들이지만.
엊그제 주말. 순자 씨가 경호 씨랑 십 년 넘게 살고 계신 집을 거의 다 버렸어요. 그 이야기는 조만간 다른 글에서 하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다 덜어내서 스물몇 평 아파트가 대궐 같아지니 경상도 싸나이 경호 씨가 아내를 저를 끌어안으며 '야, 너희 둘 덕분에 이고 지고 살던 걸 이렇게 버려 버릴 수 있구나'하시더라고요.
그러는 동안 눈가가 촉촉해진 순자 씨는 얼른 콩가루에 들깨 솔솔 뿌린 봄동찜을 청국장과 같이 한상 가득 내오셨어요. 스무 살. 어리디 어린 두 남녀가 동네에서 만나 순자 씨, 경호 씨에서 갑자기 엄마, 아빠가 되고 시부모가 되어 혼란스러워 더 했을 몽니 대신 먼저 내밀어 안아주는데 그리 오래 걸린 거겠지요.
이제부터 우리같이 '그냥 안녕'해야 하는 이유같아요. 안녕을 제대로 나눠보지 못하고, 원래 그렇게 사는 거인냥 살아왔기 때문이지 싶어요. 아내와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말씀 많이들 나누시지요? 우리 세대는 분명 부모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 양다리 걸쳐 있느라 정신적인 가랑이가 매일 찢어질 듯하다고. 우리나라 온 동네 상황이 딱 이렇죠.
글을 쓴다는 건 어디가 좀 모자란 경우인 것 같아요. 그 모자란 부분을 글 속으로 숨어들어 외치고, 반성하고, 시도하고, 다시 채우려고 시도하고. 살다, 읽다, 시도하다, 다시 살다, 읽다, 시도하는 그 과정을 써서 남기려고, 위로받으려고, 동병상련으로 기운 다시 내려고.
시키지 않는데도, 돈은커녕 밥도 안 나오는데도 꾸역꾸역 쓰려고 하는 저를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다행인 건 그렇게 쓰다 보니, 그분들을 더 잘 안아드릴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눈물 흘리지 않아요. 무한히 감사하고, 죄송하지만 당신들이 더 짠하고, 위대한 게 많다는 걸 조금, 아주 조금 느끼게 되면서 그런가 봐요.
세대에 걸쳐 놓은 가랑이가 찢어지기 전에 유연해지려면 우리 때부터 바뀌어야 하는 거 맞죠? 가랑이가 이어 놓은 두 다리가 세대를 연결하는 튼튼한 오작교가 되어야 하는 거 맞죠? 나를 둘러친 수많은 깃발들 사이 넓은 사래에서 사람답게 잘 넘어가려면 우리 오늘도 같이 안녕해야, 서로의 안녕을 챙겨줘야 하는 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