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Feb 15. 2024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맞구나

[오늘도 나이쓰] 19

나는 야구장을 참 좋아한다. 그곳은 속에서부터 다져진 반듯함과 영혼까지 건강한 번듯함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덕에 엄격한 규칙과 잘 짜인 질서 속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 좋다. 우리 팀도 상대팀도 모두 오랜 시간 자신에게 투자한 이들이 모여들어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배울 수 있어 더 좋다.  


나에게 야구장은 해방의 공간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본능의 열광을 일부러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토해낼 수 있는 곳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뜨거운 심장을, 기분 좋은 흥분을, 실망하지 않는 고독을, 숭고한 열광을 180분 넘게 옆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일 늦은 저녁. 거의 다 빠져나간 차들이 남긴 온기에 엉덩이를 대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별을 들어 건배를 하는 게 야구장 말고 어디가 더 가능할까. 우리 팀이 이긴 날은 이긴 기쁨에, 진 날은 다음에 대한 기대감에

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들고만 있어도 나는 술고래가 될 자신감까지 뿜어져 올라오는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12월, 1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나의 야구장을 가득 메울 선수들은 새 직장을 구하느냐, 멈추느냐의 기로에 서는 시기다. 그렇게 전체 등록 선수의 약 10% 정도 되는 선수들만이 나의 야구장에 설 수 있다. 그러게 그게 끝이 아니다.


2월, 3월은 시즌을 준비하는 시기다. 다가 올 스프링을 위한 캠프에서 몸을 만들고 또 만들어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 마음을 챙겨서 일주일 내내 전국을 돌아다녀야 하는 체력과 뜨거운 여름, 비난과 시기, 자괴감으로부터 자신을 이겨낼 영혼을 단련시켜야 한다.


과정에서 진짜 자신과 만나면서 계속 갈지 멈출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할 거다. 자신만의 야구장을 가진,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25살. 단 7년의 전문 경력을 가진 젊은이가 새로운 직장과 계약을 하면서 240억이 넘는 연봉 조건에 사인을 했다. 한마디로 대박이다.


부모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올인하지도 않았고, 거물 스폰서가 있어서도 아니고, 높은 하늘에서 달려 내려온 낙하산 부대도 아닌데 말이다. 올해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될 야구선수 이정후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응원했던 쌍둥이 팀이 유독 약해했던 이 선수는 처음 시작이 부모의 이름이 형용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이 넘지 못한 벽을 자식이 대신 넘어서 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 선수의 경우는 반대다. 바람의 아들의 아들로 태어난 이 선수도 대략 난감했을 듯하다. 태어나 보니 내가 그 유명한 사람의 아들이었던 게. 부모가 워낙 유명하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 명성의 울타리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부모가 못 넘은 벽을 넘으려 해도, 부모의 벽을 넘으려 해도 둘 다 자신의 실력으로 증명해 내야 하는 건 인생의 숙제 같다. 이래저래 부모보다는 자식이란 역할이 결코 더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선수의 경우 지금은 분명 부모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를 증명하고 있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어린아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내 눈에도 가장 눈에 띄는 게 화려한 유니폼이고 멋진 외모고 결과적으로 수입액이다. 뭐,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 세계에서 탑 오브 탑은 연봉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해는 된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 속에는 엄청난 돈더미의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겪어본 게 사실이다. 결국은 돈이지만 결론은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모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를 쓰는 선배가 있다. 기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 선배가 전하는 '잘되는 선수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실력도, 성실성도, 인성도 아니다. 그건 바로 나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유무였다. 그건 물리적인 나이와 관계없단다. 아무리 어려도, 걱정스럽게 많아도 그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장일 뿐이다.


이 선수는 그 면에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난 유명한 선수들 중 의지력이 강한 가장 젊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단다. 이 선수가 최근 아름다운 미담을 하나 남겨 놓고 미국으로 떠난 모양이다. 세심하게 마음을 쓴 어느 기자에 의해 알려진 자그마한 이야기지만 왜 나이가 숫자에 불과한지를 한번 더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선수는 샌디에이고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횟집에서 회식을 한 모양이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야구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단다. 물론 이 선수만큼 성공한 선수보다는 야구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야구는 하고 있지만 아직 전성기에 닿지 못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이 선수를 알아본 횟집 사장님. 너무도 유명 이 선수의 사인을 크게 받아 가게 안에 오래오래 걸어두고 싶었을 거다. 그래서 빈틈에 이 선수에게 사인을 요청했나 보다. 종이와 펜을 내밀면서. 하지만 이 선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단다. 단호하게 거절했단다.


젊은이들끼리 (마음 상한 사장님 시점으로) 시시덕거리면서 계속 회식을 이어 갔단다. 그렇게 회식이 끝나고 이 선수는 계산을 하고 친구들과 한꺼번에 몰려 나갔다고. 유명인 사인을 걸고 싶었던 사장님은 꽤나 서운해했었을 것 같다. 그러면 그렇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정후를 봤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널브러진 마음 같은 그릇들을 챙겼을지도.


그렇게 주방으로 가 설거지 그릇들을 쌓아 두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데 이 선수 혼자 다시 가게로 들어왔단다. 어?, 왜! 하는 마음으로 휘둥그레져 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더란다. 그러면서 계산대옆에 그대로 놓여 있던 아까 그 종이와 펜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단다.


그랬던 거다. 이런저런 어려움에 있(을 수도 있)는 친구들 앞에서 난 체 하면서, 유명인 행세를 하면서 나 잘되었다고 사인을 하는 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고. 아까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면서, 정성껏 여러 장의 사인을 남겨 두고 떠났단다.


산책할 때 자주 만나는 다리 밑 어둑한 길. 바닥에 '박수를 쳐보세요'하는 그림자가 둥둥 떠다닌다. 손뼉을 치면 노란 나비들이 바닥에서 다리 위로 내 머릿속으로 가슴으로 훨훨 날아다닌다. 사계절 내내. 길을 지날 때마다 선수가, 그 친구들도 같이 다 잘되기를 빌면서 손뼉을 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선수보다 더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라는 흔한 핑계를 대느라 바쁜데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쉽진 않은 일인데 그 의미를 잊지 않고 전해줘서 기어코 세상이 아무래도 참 따듯한 곳이라고 알려주는 이들말이다.


이 선수가 우뚝 설 그의 야구장에도 오늘도 잘 살아내는 나의 야구장에도 그리고 우리 각자의 야구장에도 그들이 넘쳐나기를!

이전 18화 우리는 오늘도 '1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