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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08. 2021

불나방 천국

 

  밴쿠버에 있을 때입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였습니다.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도로 바닥에 굵게 한 줄만 그어져 있는 선-한국 횡단보도 앞에도 그어져 있는 정지선입니다- 1-2미터 앞에서 맨 앞 차가 정지했습니다. 당시에는 학생들이 건너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학생들은 도로에 인접해 있는 학교 건물 유리 정문을 이제 막 나오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지프차 뒤로 11대의 차량이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차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운전자들은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선팅을 할 수 없어 자동차 안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표정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차로 신호등의 옆 또는 아래에 "LEFT TURN SIGNAL"이라고 쓴 TAB 이 있는 곳이 여러 곳 있었습니다. 좌회전 전용 신호였습니다. 이곳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면 벌금이랍니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는 차가 없는데도, 누구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진 이유 중 하나는 운전자들이 수시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바디랭귀지로 의사를 나누는 모습이었습니다. 말로 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먼저 가도 될까 묻습니다. 먼저 가라고 웃으면서 손짓, 눈짓합니다. 


 오늘도 도로를 달립니다. 아무튼 출근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다시 도로를 달려 퇴근할 겁니다, 아마. 별 일이 없다면. 그저 이십몇 년간 그렇게 달려가고 달려오면서 별 탈이 없었다는 게 그저 고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운전하는 게 그렇게 편안하지 못합니다. 몇 해 전부터 인 것 같습니다. 교차로에서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자동차들이 늘었습니다.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신호가 내 신호로 바뀌고도 좌우를 꽤 살펴보게 됩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게 분명합니다. 대다수의 운전자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조심하게 됩니다. 


  어제 퇴근을 할 때입니다. 차선 맨 앞에서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호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좌우를 살폈습니다. 그러면서 3초가 흘렀습니다. 이쯤 되면 뒤차가 빵빵거릴 시간입니다. 하지만 뒤차는 기다려줬습니다. 그리고 움직이려고 하려는 찰나, 왼쪽에서 검은색 차량이 좌회선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급정거를 했습니다. 뒤차도 급정거를 했고요. 그 차는 다행히 나를 앞질러 직진 차선으로 들어왔습니다. 직진 길은 살짝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그 차는 좌회선과 동시에 제 앞에서 브레이크등이 벌게졌습니다. 바로 출발했다면. 아찔했습니다. 본인도 놀랬는지, 겁을 먹었는지, 센 척하는 건 지 아무런 표현도 없었습니다. 


  한두번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제일 앞에 있지만 안았다 하더라도. 매일 매일 보게 됩니다. 그 사이사이를 오토바이들이 질주합니다. 분명, 방콕에서 봤던 무질서속의 질서와는 다른 상황입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너네 나라 나쁜 나라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 대 인간으로의 관심입니다. 배려입니다. 사랑입니다. 존중입니다. 이해입니다. 당신도 오늘 하루 애쓰시는군요라는 챙김입니다. 인간성 회복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에 대한 회복입니다. 오죽하면, '00이도 어느 가족의 소중한 딸, 아들입니다'라는 기계음이 넘쳐나겠습니까.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 속도전이 나를,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수많은 이들의 공약, 그 어디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노력은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게 되겠어'하고 말아 버립니다. 


  퇴근하는 동안 한참 잔상이 남았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아 서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습니다. 나도, 그 사람도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잘 살아남기를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육두 문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불나방처럼 살아야 할까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 속도를 내는 삶이 왜 계속 반복될까 하고 말이지요. 우리는 지금껏 개별적인 문제로 치부하고는 있지만, 집단 무의식 상태에서 벌어지는, 속도전입니다. 도로는, 운전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생각의 단편적인 표현 공간 중 한 곳일 뿐입니다. 건물 안에서도, 건물 밖에서도 세상에 대처하는 방식인 겁니다. 그 속도를 어떻게 하면 늦출 수 있을까요. 어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안내하고 도와줘야 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중학교 2학년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게 진정한 선진국일까요, 모두 같이 잘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은, 안전한 나라일까요.


  짧게는 십수년 뒤에 우리 아이들이, 먼저 살다 간 우리들에게 묻는 질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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