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째 먹구름입니다. 어제는 퇴근하면서 바로, 1시간 20분 넘게 걸었습니다, 강제로. 우리 집 타닥이는 낯선 사람-녀석 입장에서 말입니다-을 엄청 경계합니다. 처음 만난 지 5분이 문제입니다. 나름의 탐색을 하면서 내내 짖습니다. 5분 정도 지나면, 상대방이 반응이 없으면, 짖기를 멈춥니다. 대신 자기 방석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냄새를 맡습니다만. 언젠가는 한번, 다른 코디분의 뒤꿈치를 물었답니다. 아주 살짝. 본능적인 반응에 녀석 스스로가 놀라서, 방석에 올라가 아내 눈치를 봤다고 합니다. 양말 부분이었고,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코디 분도 웃으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제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찾아오시는 코디분-담당이 바뀌셔서, 녀석에게는 다시 낯선 분일 겁니다-이 오시는 날이었답니다. 퇴근하는 길에 아내가 전화를 했습니다. 어떡하냐고?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녀석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코디분이 올라오시기 전에 내려오려고. 그렇게 대략 4킬로 가까이 걸었습니다. 어둑하고 한적한 골목골목으로만 찾아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8 천보를 걸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는 사이 우산을 쓸 만큼은 아니었지만 가랑비는 계속이었습니다. 가랑비에 내 옷 젖는 줄 모르고 계속 걸었습니다. 문득 녀석을 바라봤습니다. 걷는 뒤태가 확연히 터덜거렸습니다. 갑자기 나온 산책에 좋아라 했지만, 너무 많이 걸었고, 비도 내려서 그랬나 봅니다. 귀 속으로는 계속 재즈가 흘러들어 왔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걸쭉한 음색의 'A Foggy Day'에 이어서 페리 코모의 'White Christmas'였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갑작스럽게 영원히 사라진 아이. 이제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세상은 무슨 일 있었나 싶게, 너무 나도 잘 돌아가냐, 고 묻고 있었습니다.
목줄이 '탁'하고 당겨졌습니다. 뒤돌아 봤습니다. 타닥이가 정확하게 흙을 벗어난 벽돌 위에 똥을 싸고 있었습니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비를 맞아 귀가 축 쳐진 타닥이와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미안해졌습니다. 가늘지만 계속해서 내리는 빗줄기 덕분에 흔적 없이 뒤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세상에 없지만, 내 귀속은 계속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그 아이를 밀어낸 건 상생지원금을 신청하라고 날아드는 카드사들의 과하게 친절한 문자들이었습니다. 며칠 전 밴드에서 워치로 바꾸면서 알람을 무음으로 설정해두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그걸 해야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그대로 출근해서, 비는 틈에 이 글을 쓰고 있네요. 이 글을 다 쓰고, 설정을 무음으로 꼭 바꿔야겠습니다.
상생지원금도 신청해야 하고, 워치의 알람도 무음으로 바꿔야 하지만, 어제 그때는 '낮에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하고 스스로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는데 갑자기 혼자 '풉'하고 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행히 마주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반려인은 저만치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휙 하고 돌아들어 갔습니다. 내 앞으로 누가 지나가다 봤다면 '뭐야' 했겠다 싶었습니다. 저만치 비켜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건물주로 나왔던 남자 배우가 있습니다. 이름이 오 뭐였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광고하는 노란 비타민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띠로리'하면서 나오는 그 광고. 거기에 보면, 늦게 늦게 퇴근하면서 '아 퇴근이다'하고는 침대에 몸을 푹 날립니다. 그러다 바로 용수철처럼 튕겨서 일어나면서 '출근해야지' 합니다. 느닷없이, 그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 만들었다, 싶어 각인이 된 장면인가 봅니다.
그러다 문득, '아내는 혼자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싶어 지더군요. 전화를 했습니다. 코디분이 마지막으로 안마의자를 청소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녁은 뭘 먹을까 하더군요. 맞아요. 뭘 먹을까가 늘 중요하니까요. 그러면서도 늘 비슷한 걸 먹지만. 중요합니다, 아주. 누구랑 먹을까는 이미 약속되어 있으니. 그런 걸 덜 걱정할 수 있어서, 부부인 게 다행이다, 가족이어서 고맙다, 식구여서 좋다,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어디에 올라온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분명, 혼자 나가게 한 미안함때문일거였습니다.
여동생이 오빠한테 톡을 했답니다. '오빠?' 하고. 바로 날아든 오빠의 답은 '시끄러'였다네요. 여기서부터 폰 넘어 들리는 아내의 목소리는 벌써 웃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코미디언은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자기가 마음껏 먼저 웃으면서,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부분은 잘 못 알아듣게 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입은 웃으면서 눈을 벌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저한테 그럽니다. '자기도 마찬가지야'라고. 나이 얼마 먹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저런 눈물이 많아 지네요. 그런데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웃긴 이야기보다, 서로를 보면서 더 웃겨합니다. 여하튼, 여동생이 다시 톡을 보냈답니다. '오빠, 나 속이 불편해', 그랬더니 그 오빠가 그랬다면서, 목소리가 데구루루 구릅니다. '응, 넌 겉이 더 불편해!'라고. 아마, 아내는 지금 혼자 소리 죽여 울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댓글이 더 웃기다며, 더 크게 큭큭거립니다. 전화기에서 통곡을 합니다. '잉? 하루 만에 답을 한다고?'. 우리 남매들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아내한테 그랬습니다. '그 댓글, 우리 딸이 쓴 거 아닐까?'하고.
어제, 그제는 류완님의 걷기에 관련된 글을 읽고 있습니다. 박식하신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니 글을 더 읽고 싶어 집니다. 마치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를 처음 접했을 때의 행복한 기분이 살아났습니다.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의 흥분이 다시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얼굴 모르는 작가님께 무척 고마워집니다. 글 속에서 다른 글을 만날 때는 정말 행복해집니다. 우리 살다 보면 그렇잖아요. 조금 읽고 싶어서 애써서 읽다 보면, 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요. 읽지만 말고 나도 좀 쓰면서 나를, 주변을 살펴보고 싶어 애써서 쓰다 보면, 그렇게 좋은 글들을 읽을 시간은 영원히 없을 것 같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애써서 읽는 글 속에서 다른 글을 또 읽을 수 있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요.
발길 닫는 곳마다 맑은 정신으로 허용적인 모습에 따라 걷고 싶어 졌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언젠가는 계속 걷기만 하겠다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라도 되면 고맙겠다 싶어 졌습니다. 달리기를 싫어하는 아내와 가끔 산책을 할 때, 자꾸 앞서 걷게 됩니다. 먼저 가 기다리면서 윽박을 지르는 것 같아 조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올해 반백살이 넘어갑니다. 하지만, 아직 넉넉하게 어른스럽지는 못합니다. 어쩔 때는 옹졸해지는 모습에, 스스로가 미워지기도 합니다. 달려드는 후회에, 어쩔 줄 모를 때도 많습니다. 얼굴 표정에 책임져야 할 나이라는 말에 알아서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달리기가 더 좋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직은 어른스럽게,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면서 걷는 힘이 부족해서입니다. 구름처럼 밀려들고, 밀려 나는 생각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이 없어서입니다. 오로지 단순하게 내 심장, 내 호흡, 내 관절과 근육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 맑은 표정으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어주고, 양보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많은 걷는 이들 사이에서 얼른 내빼려고 달립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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