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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08. 2024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참가비

[노랫말싸미] 8

혹시 박세민이라는 희극인을 아세요? 아시는 분들은 저와 비슷한 세대이실 겁니다. 지금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거든요. 이 희극인은 유독 팝송을 개그 소재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대부분 우리에게 익숙한 팝송 중 한 두 소절을 우리 귀에 들리는 대로 이야기를 지어서 스토리텔링을 했습니다.


신기한 건 말입니다. 미리 이렇게 들릴 겁니다,라고 말을 하고 그 소절을 들려주면 영락없이 그렇게만 들린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 영어 리스닝이 제대로 되지 않는데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몇몇 영어 전문가들이 비판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희극인들의 표현대로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고 지나갔던 같습니다.


그런데 그 치명적인 장애물이 저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더군요. 요즘에도 그때의 팝송을 (우연히) 듣다 보면 그렇게 들렸던 부분은 여전히 그렇게 들리는 걸 보면 말입니다. 차이점은 그동안 저의 서사들이 쌓여 같은 팝송도 꼭 그렇게만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팍팍하지만, 피식하고 웃으면서 넘겨버릴 수 있는 유쾌한 여유 정도여서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정말 혼자였던 그때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혼자 밥을 짓고 눈물을 지었죠. 아, 지나고 보면 그때 글도 지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제 마음을 글로 더 잘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가장 최근(!)에 기억나는 곡은 탑건 매버릭 OST 중 한 곡입니다. 한참 유명했던 장면 있죠.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모래 위에서 대원들과 발리볼을 하는 그 장면.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 솟죠. 당장 뛰쳐나가 운동하고 싶다, 마음껏 도전해보고 싶다, 다시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던 그 장면.


때마침 흐르던 OST속에서 저는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런 날들이 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들이 모두 다 내 생애에서는 '기쁨 주는  나알~'이라고. 어제 이 노래를 남매들이 듣고 있길래, 또 가만히 그냥 못 지나가고 알려줬습니다. 그랬더니 열아홉 따님이 피식하는 동안 스물둘 아드님은 박장대소를 하느라 볼까지 벌게 지더군요. 3년 더 살았다고 아재의 피가 더 많이 흐르긴 흐르는가 봅니다.


저는 부모님 덕분에 우리 남매들보다 한참 더 어렸던 열일곱부터 낯선 도시에서 혼자 살기를 시작했었습니다. 원조 혼합, 혼술 세대쯤 됩니다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생애 첫 월세는 18만 원으로 시작해 20만 원대 후반에서 10대를 마친 것 같습니다.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는 20만 원 후반에서 30만 원 초반, 대학원을 다닐 때도 30만 원대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럭셔리한 월세도 있었겠죠. 저는 돈에다 집을 맞춘 경우이긴 합니다. 어찌 되었건 집에서 지원을 받아도 일을 하면서 조금씩 벌어도 매달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월세였지요. 일단 월세 준비를 끝내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가 있었으니까요.


결혼하면서부터 지금껏 맞벌이를 하는 아내덕에 월세, 전세를 벗어난 지 꽤 여러 해 흘렀을 때였습니다. 때, 있습니다. 아마 따님이 중학교에 입학을 앞둔 즈음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우연하게 라디오에서 한 팝송을 들었죠. 그런데 그 팝송 가사가 글쎄 다 '월세, 월세, 월세'라고 들리는 겁니다. 영어 못하는 티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또 그렇게 들린다는 게 스스로 한심하게 재밌더군요.  


차를 멈추고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worth it'이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2010년대 팝송이더군요. 이 노래를 얼마 전 우연하게 라디오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차 뒤에는 남매가 타고 있었죠. 혼자의 서사에 10년 전의 기억까지 떠올라 차 안에서 또 혼자서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크게 따라 불렀습니다. 물론 그 부분만.


동시에 둘 다 고개를 들어 룸미러에서 저와 시선이 맞닿은 따님도, 아드님도 (원래 자주 그러는) 저를 한번 슬쩍 보고는 (원래처럼 혼자 잘 노시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이내 고개를 숙이고 폰을 보고,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하더군요. 그런 남매들을 오히려 한참 물끄러미 쳐다본 건 저입니다. 이 여름 끝에 자신을 가치 있게 다듬을 새 길을 찾아 떠나려는 남매들을.


몇 해 전 먼저 떠나 낯선 도시 밴쿠버에서 몇 년을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드님. 그곳은 원래 어마어마한 월세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드님이 혼자 거주하고 있는 일곱, 여덟 평 남짓되는 목조 가옥 원룸의 월세가 저 때보다 다섯배 가까이가 됩니다. 물와 장소가 다르긴 하지만 그 동네에서 가장 저렴한 곳 중의 하나라는군요. 그것도 사람 좋은 이탈리안 호스트의 배려 덕분이라고 하네요.  


저는 벗어났지만 남매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할 겁니다. 월세가. 하기야 그곳은 우리와 다르게 (외국인은 불가능한) 구입 아니면 렌트이긴 합니다만. 이제 따님까지 같이 날아가 거주하게 되면 두 배의 월세가 들 겁니다. 아드님이 자기 몫은 어떻게 보태보겠다고 하지만 공부하면서 그리 녹녹하지 않을 건 분명합니다.


그것보다 '월세 worth it'. 월세가 하루하루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세상살이 참가비라는 태도를 얼른 몸에 익히기를 먼저 빌 뿐입니다. 부모가 은행에 돈을 쌓아 놓고 그때마다 보내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인생 자체가 월세인 듯하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스스로 기분을 좋아 만들고, 가라앉은 마음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한 두곡은 꼭 흥얼거리면서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저 혼자의 생각입니다만 말이 안 통하니까 더욱 좋겠다 싶습니다. 허밍으로 남들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깊은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노랫말들 말입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언어를 쓰면서 하루, 하루를 채우든 간에 말이죠. 그 속에서 삶을 기쁘게 견디는 에너지는 풀, 바람, 공기, 구름, 햇살 같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순간부터, 그것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부터 쌓이는 거니까요.


그런 순간순간마다 허밍으로, 심호흡으로 자신을 가라앉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루틴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노랫말을 꼭 지니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대중가요 노랫말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통속의 미학을 배우게 한다는 은유 작가의 말에 언제나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노래할까요. 무재씨가 말했다. 은교 씨는 무슨 노래를 좋아하나요. 나는 칠갑산 좋아해요. 나는 그건 부를 수 없어요. 칠 갑산을 모르나요. 알지만 부를 수 없어요. 왜요. 콩밭, 에서 목이 메서요. 목이 메나요? 콩밭 매는 아낙이 베적삼이 젖도록 울고 있는 데다, 포기마다 눈물을 심으며 밭을 매고 있다고 하고, 새만 우는 산마루에 홀어머니를 두고 시집와 버렸다고 하고........"(황정은, "백의 그림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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