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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21. 2024

하루가 하루에게

[오늘도 나는 감탄寫] 35

어제. 새벽 4시에 출발해서 400km 넘게 달려갔다 달려온 벌초. 열한시간만인 오후 3시 가까이 되어서 도착을 했습니다. 수도권은 내내 더웠다는데 아버지와 올라간 할아버지 묘에서는 한참 폭우를 만나 온몸이 다 젖어버렸습니다. 게다가 5년 만에 꺼내 들고 간 예초기도 엔진이 꺼진 후 다시 작동되지 않았네요.


언제 와도 낯선 어둑한 산속에서 아버지와 저는 둘이 엎드리다시피 해서 낫과 손으로 잡초를, 풀을, 나무를 가르고 뽑아내었습니다. 날씨보다 더 어둑해진 아버지 표정 때문에라도 허릿병을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목덜미, 어깨, 등으로 떨어지는 빗줄기가 묘 주변에 드리워진 나뭇잎 덕분에 털을 뭉쳐 만든 안마봉 같더군요. 


집에 돌아와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우비를 뚫고 들어 온 땅벌에 물린 허벅지가 따끔거리긴 하지만 상쾌해집니다. 아내가 미쳐 버리지 못한 음식물을 들고 중문을 열고 다시 나갔습니다. 눅눅하게 후텁한 공기가 콧구멍에 랩이 날아와 달라붙듯이 훅합니다. 다행히 출입문을 열자마자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머물러 있습니다. 얼른 짜와~ 하고 요란하게 에어컨이 나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야겠다 싶어 집니다. 


그런데 두 세 걸음 걷는 사이 13이란 붉은색 숫자 밑으로 더 붉은듯한 화살표가 깜빡입니다. 아, 몇 초만, 한 걸음만, 아니 손가락을 조금 일찍 뻗어 누르기만 했었어도 엘리베이터를 단박에 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사이 내려갔던 엘리베이터는 일부러 더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 같습니다. 25층 꼭대기까지. 


두 번을 모은 음식물 쓰레기가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이 몇 번 동안 만난 음식물 냄새만으로는 식구들이 무엇을 나눠 먹고 남겼고, 다시 새로운 음식을 먹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뒤섞여 오묘한 냄새가 맴돌았습니다. 


땀을 잘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 추운 것보다 더운 것을 열 배쯤은 더 좋아라 하는 체질인데도 층층마다 들리는 엘리베이터를 텁텁한 좁은 공간에서 기다리는 건 결코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 한참을 기다렸다 한 번에 꼭대기층까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지만은 않습니다. 


최대한 사회적인 미소(얄아홉 따님의 고급진 표현입니다)를 지으면서 13층에서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는데, 순간 땀내가 엘리베이터 가득합니다. 검은색 코수염에 검은색 민소매, 검은색 바지에 맨발로 검은색 슬리퍼를 신은 택배기사였습니다. 


아무런 소리 없이 저와 같이 13층으로 내려가면서 11층, 7층, 4층 그리고 2층까지 네 개층을 더 멈추고서야 1층에서 같이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열림버튼을 누른 사이 수많은 택배 상자를 싣고 왔을 초록색 손수레를 끌고 앞서 나가는 택배 기사의 등에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 젖은 도마뱀 (그림)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있는 음식물 수거함 제일 끝 바닥에 누군가가 음식물쓰레기가 다 들여다 보이는 투명 비닐봉지를 바닥에 놓아두고 사라졌습니다. 어깨를 내리쬐는 뜨거움 속에서 잠깐 생각을 했네요. '깜빡했을 거야. 내가 대신 들어 버릴까?' 그러는 사이 따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빠, 아빠. 참, 오늘 오늘 코코 병원!'


아, 예약한 걸 깜빡했습니다. 얼른 좀 전에 세워 둔 차를 지하에서 꺼내 따님 대신 코코를 안고 내려온 아드님과 함께 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 6주 동안 저처럼 디스크를 다쳐 치료 중이거든요. 뛰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는 중입니다. 


출발하는 룸미러 뒤로 바닥에 나뒹구는 음식물 봉지가 한가득 들어옵니다. 두 달 전 출산을 한 원장님이 코로를 진료하고 그러십니다. 가족들 사랑이 커서 그런가요, 아주 좋은 속도로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은 한 달 뒤에 뵈면 될 것 같고요, 오늘부터 다시 조심스럽게 산책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이 소식을 들은 아내도 따님도 벌초에 밀려 심심했던 하루의 지루함, 심심함이 달아나는 듯 한가 봅니다. 그러면서 그럽니다. '아빠, 피곤하셔서 쉬셔야 하니까. 오늘은 각자 집에서 쉬자'라고. 우리 집에서는 운전을 저만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저의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는 반경이 정해져 왔습니다. 허릿병 이후로는 더욱 그랬죠.


집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른 강아지를 무서워하느라 잔뜩 긴장했다 그제야 신나 하는 코코를 보면서 아내를, 따님을, 아드님 얼굴도 돌아봤습니다. '아빠는 오늘 피곤하시니까 쉬어야 한다'지만 방학 첫날을 아쉽게 보내고도 쉽지 않다고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더위에, 눅눅함에, 무료함으로 휘감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내는 거실 벽면에 기대어서, 따님과 아드님은 인사만 잠깐 건넨 뒤 자기 방으로 빨려 들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알죠. 심심해, 아까워, 놀아줘 하는 조용한 아우성을 말입니다.   


'얘들아? 자기야! 우리 나갈까?' 시원한 쇼핑몰 가서 좀 걷고 맛난 거도 좀 먹을까? 오늘 아빠가 쏠게!'. 그러자마자 스물 하나 아드님은 출입문 옆 화장실로 씻으러 들어가더군요. 따님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볼에 파우더를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샤워를 마친 아내는 '오늘은 뭐 입을까?' 하며 안방 드레스장을 열었습니다. 


빗길에 천천히 달려가 밥도 (같이) 먹고, 옷도 (같이) 봐주고, 아이스크림도 (같이) 나눠 먹고, 한참을 (같이) 걷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는 각자 돈으로 산 자기 옷들을 입어 보며 거실 패션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제야 몽롱하게 하루의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는데, 묘하게도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안의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어제가 오늘에게 당부를 합니다. '네가 이 집의 하루야. 저 사람들 각자의 하루가 너의 하루와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어. 평소에 잘해둬. 아침 운동을, 기록을, 기억을. 언제나 체력을 먼저 키워두어야 해. 끝까지 사랑하려면. 너를 잘 간직하는 게 가족을 가장 잘 지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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