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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l 14. 2024

아빠예~

[오늘도 나는 감탄寫] 34

'아빠, 나 오늘 왜 이렇게 이쁘냐?' 하면서 옆에 있는 따님이 눈을 찡긋거리면서 셀카로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보여줍니다. 그중에서 가장 예쁜 걸 골라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를 골라 주니 그럽니다. 항상 뒤따라오는 멘트입니다. '아빠한테 보내줄까?'. 그렇게 어렵게(?) 받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추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출근길. 신호 대기 중 라디오에서 영국의 아빠 수업이라고 들렸습니다. 이내 신호는 바뀌었고 저는 또 달렸습니다. 다음 신호등까지는 살짝 언덕을 올라간 후 짧은 터널을 통과해 크게 언덕을 내리 달려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시간은 막혀도 천천히 달려 5분 이내.


문득 디제이의 멘트를 타고 15년 가까운 시간이 훌쩍 스쳐 올라가더군요. 소속 기관이 아닌 타 기관으로 1년간 파견을 나간 해였습니다. 파견 기관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근무를 하는 형식이 아니라 행정적인 소속만 그 기관이었고 개별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정기적으로 팀원들 간 연구과제를 공유하던 연구년이었지요.


지난주인가요, 출퇴근 시간에 활용할 수 있는 육아 시간이 만 8세까지 총 360일로 늘어난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따님 어릴 때는 그런 제도가 없어서 난감했던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참 다행입니다. 그래도 저는 파견근무 덕분에 내년에 스물이 되는 따님이 네 살 때 몇 개월 간 유치원을 등하교시킬 수 있었네요. 


푹 자는 모습, 눈곱도 떼지 못하고 달려와 안기던 온기와 냄새, 꿈속에서도 아내와 저를 찾으려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모습, 오후 3시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 노란 차창에서 목을 길게 빼고 시선이 먼저 기다리는 저를 찾아 더듬거리던 눈동자가 지금 따님에게도 자주 보이는 이유일 겁니다.. 


그때 아침마다 가장 신경이 쓰인 건 따님의 긴 머리를 말리고 묶는 일이었습니다. 아내가 따님의 동그란 머리 모양처럼 물을 바른 듯 뚝딱 먼저 묶어 주고 출근을 해서 일주일이면 한두 번이었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더군요. 


이런 기억이 5분 만에 휘리릭 소환된 이유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영국의 아빠수업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아빠들한테 학교에서 수업하는 내용 중에 머리 묶어주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하기야 저도 그때 난생처음 머리를, 긴 머리를 묶어야만 했었네요. 아무런 연습도, 기술도 없이 갑자기 다음날 아침부터. 


어찌어찌 묶어 주긴 주는데 데리고 내려가 노란 차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엄마들이 자꾸 따님 머리만 힐끔거리는 것 같았던 혼자만의 기억이 한참을 좇아 다녔던 것 같거든요. 처음 일, 이주는 계속. 여러 번 연습을 하느라 따님을 귀찮게 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아마 어떤 날은 저녁에 따님 잠들기 전에 아내한테 부탁해서 미리 머리를 묶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시 무던하게 반복하는 연습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됩니다. '아빠는 왜 할머니처럼 머리를 못 묶어?' 하면서 칭얼대던 따님도 어느 순간부터는 머리를 묶는 동안 편안하게 졸기도 했거든요. 


'자, 됐어. 아빠랑 내려가자'라고 하면 졸리는 뽀얀 눈으로 거울 속에서 뒤에 앉아 있는 저를 올려다보며 다른 손가락만큼 가늘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기도 여러 번 했었거든요. 아침 9시가 조금 넘어 노란 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란히 옆에 나와 있던 다른 엄마들(그 몇 개월 간 모두 그 시간에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보호자 중 아빠는 제가 유일했습니다)이 머리를 참 예쁘게 묶었네요, 할 정도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머리 모양이 예쁜 따님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 짱짱하면서도 단아하게 보이게 하는 점, 뒷머리 매듭에 리본 모양을 예쁘게 묶는 점, 마지막으로 한올의 잔머리도 흘러나오지 않게 양손에 살짝 물과 스킨로션을 발라 문질러 주는 할머니의 고난도 스킬을 흉내 내는 건 쉽지 않았었네요. 


언제나 넉넉하지 않았던 짧은 몇분의 시간내에 흰색 카라 원복 다 차려 입은 따님 볼로 귀뒤로 물기도 흐르지 않고 머리결이 번들거리지도 않고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한 결 같은 머릿결을 만드는 것은. 물과 로숀의 순간적인 배합의 비밀은 제 손바닥위에서는 끝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자연스레 세 가지 원칙을 터특했었습니다. 머리를 잘 묶어주는 원리는 명확합니다. 그건 '아빠예!'였습니다. 아프지 않게, 빠르게, 예쁘게. 제가 한참을 시간 끌면서 알아낸 그 원칙. 그 세 가지가 그대로 라디오에서 머리 묶어주기 원칙으로 흘러나오고 있어 정말 놀랐습니다. 혼자 운전을 하고 가면서도 '훗'하고 만족스러운 감탄사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더군요.


라디오에서는 아빠들이 왜 머리를 엄마들처럼, 제가 연습을 반복하면서 터득한 '아빠예' 원칙이 잘 적용되지 못하는지까지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습니다. 아빠들은 엄마들보다 손가락이 더 굵어서, 아빠들은 엄마들보다 손 근육이 많이 굳어 있어서,라고 말이죠. 


디제이의 멘트를 들으면서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따님이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내내, 항상 따님 뒤에 앉아 머리를 묶어 주던 마음이 계속이었지 싶어 졌습니다. 그러면서 '아빠예~', 이 능력은 아빠들한테만 필요한 것이 아니지 싶어 집니다. 


직업 중에 손을 자유자재로, 섬세하게 활용하는 능력이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하고 말이죠. 연주가도 무용가도 프로그래머도 디자이너도 판사도 경찰도 군인도 치킨집 사장님도 피아노 학원 원장님도 아파트 경비 반장님도 창던지기 선수도 운전기사도 아빠도.


이미 우리는 다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긴장되는 순간, 한숨 돌리는 순간, 다시 시작하는 순간, 해결이 다 되어 가는 순간, 심호흡을 하고 싶은 순간에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게 손가락을 털고, 깍지를 껴 기지개를 켜고,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는 것을 보면. 


따님은 오빠를 따라 한 달 뒤면 공부를 하러 집을 떠납니다. 열몇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곳으로. 비행기를 타는 모습을 어찌 볼까 벌써부터 그렇습니다. 하지만 또 잘 떠나보낼 겁니다. 따님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빠르게, 예쁘게 묶어주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 둘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프지 않게, 빠르게, 예쁘게 묶여 있었으니까요. 


말도 음식도 환경도 게다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전공도 다 설은 곳에서 이런저런 고민도, 아픔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또 다 잘 해낼 거라 믿어지는 건 눈만 감으면 코 끝에서 일어나는 따님의 온기, 향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얼마가 걸릴지 모르지만 그동안 저는 열심히 손가락 스트레칭을 꾸준하게 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당장 손가락 관절 꺾기를 멈추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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