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Aug 06. 2024

#잘 될 수밖에 없는 선수들

[오늘도 나이쓰] 49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오래전처럼 올림픽을 실시간에 큰 화면으로 즐기지는 못합니다. 이미 끝나고, 짧게 다듬어 놓은 하이라이트 영상으로만 접해도 흥분과 기쁨, 진한 아쉬움에 불쑥 올라오는 울컥함까지 충분히 느낄 수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올림픽 영상들을 보면서 문득 다른 곳이 떠오릅니다. 


속까지 다져진 반듯함과 영혼까지 건강한 번듯함이 공존하는 공간. 엄격한 규칙과 잘 짜여진 질서 속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 저에게는 야구장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리 팀도 상대팀도 모두 오랜 시간 자신에게 투자한 이들이 모여들어 최선을 다해 사는 모습을 배울 수 있어 더 좋구요.            


야구장은 해방의 공간입니다. 제가 지닌 본능의 열광을 일부러 흐트러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토해낼 수 있는 곳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뜨거운 심장을, 기분 좋은 흥분을, 실망하지 않는 고독을, 숭고한 열광을 180분 넘게 옆에서 계속 지켜볼 수 있는 공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평일 늦은 저녁. 거의 다 빠져나간 차들이 남긴 온기에 엉덩이를 대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별을 들어 건배를 하는 게 야구장 말고 어디가 더 가능할까요. 우리 팀이 이긴 날은 미안한 기쁨에, 진 날은 다음에 대한 기대감에 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들고만 있어도 저는 술고래가 될 자신감까지 뿜어져 올라오는 듯한 현기증을 느낍니다.


일년 중 12월, 1월, 단 두달.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새해에 야구장을 가득 메울 선수들은 새 직장을 구하느냐, 멈추느냐의 기로에 서는 시기입니다. 스토브 리그라고도 하죠. 선택된 자에게는 뜨겁지만 대다수의 많은 이들에게는 금방 식어버릴 시기죠. 


저에게는 올림픽도 거대한 야구장처럼 다가옵니다. 배드민턴 준결승에서 부상으로 결국은 기권을 한뒤 한참을 매트에 울먹이던 스페인 선수도, 그 선수 덕에 결승전에 나갈 수 있었던 있었던 중국 선수도, 센강에서 구토를 하면서 비틀린 몸을 견뎌낸 독일 선수도, 바람과 야유와 더위에도 활이 날아가는 초점을 잃지 않았던 우리나라 선수들도 모두 그런 시간들을 이겨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사람들이건 더 큰 박수를 보내는 대상은 오로지 금메달을 딴 선수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올림픽에서 자주 접할 수 있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등보다 인간다움, 인간성을 잃지 않는 선수들 말이죠. 승리도 당당하게, 패배도 정정당당하게 받아 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냥 울컥하기만 합니다. 


모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를 쓰는 선배가 현직에 있습니다. 기사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죠. 선배가 전하는 '잘되는 (야구)선수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라고 (자주)확언합니다. 실력도, 성실성도, 인성도 아니다. 그건 바로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유무였다고 말이죠. 


그건 물리적인 나이와 관계없답니다. 아무리 어려도, 걱정스럽게 많아도 그건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입장일 뿐이니까요. 한 선수는 그 면에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만난 유명한 선수들 중 의지력이 강한 가장 젊은 선수 중 한 명이었답니다. 


한 선수가 최근 아름다운 미담을 하나 남겨 놓고 미국으로 떠난 지 반년이 다 되어 갑니다. 비록 큰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면서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현지에서도 벌써 큰 기대감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라는 평가입니다. 바로 야구선수 이정후입니다.       

    

이 선수는 샌디에이고로 떠나기 전 친구들과 횟집에서 회식을 했던 모양입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야구를 시작했던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네요. 물론 이 선수만큼 성공한 선수보다는 야구 자체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어가는 친구들도 있었고, 야구는 하고 있지만 아직 전성기에 닿지 못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이 선수를 알아본 횟집 사장님. 너무도 유명한 선수의 사인을 크게 받아 가게 안에 오래오래 걸어두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빈틈에 이 선수에게 사인을 요청했나 봅니다. 종이와 펜을 내밀면서. 그런데 그 선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는군요.          


젊은이들끼리 (마음 상한 사장님 시점으로) 시시덕거리면서 계속 회식을 이어 갔답니다. 그렇게 회식이 끝나고 이 선수는 계산을 하고 친구들과 한꺼번에 몰려 나갔다고. 유명인 사인을 걸고 싶었던 사장님은 꽤나 서운해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정후를 봤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널브러진 마음 같은 그릇들을 챙겼을지도.     


그렇게 주방으로 가 설거지 그릇들을 쌓아 두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데 이 선수 혼자 다시 가게로 들어왔답니다. 어?, 왜! 하는 마음으로 휘둥그레져 있는데, 사정을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러면서 계산대옆에 그대로 놓여 있던 아까 그 종이와 펜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다는군요.          


그랬던 겁니다. 이런저런 어려움에 있(을 수도 있)는 친구들 앞에서 난 체 하면서, 유명인 행세를 하면서 나 잘되었다고 사인을 하는 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아까 그 자리에서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면서, 정성껏 여러 장의 사인을 남겨 두고 떠났답니다.          


산책할 때 자주 만나는 다리 밑 어둑한 길. 바닥에 '박수를 쳐보세요'하는 그림자가 둥둥 떠다닙니다. 손뼉을 치면 노란 나비들이 바닥에서 다리 위로 내 머릿속으로 가슴으로 훨훨 날아다닙니다. 사계절 내내.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이 선수가, 그 친구들도 같이 다 잘되기를 빌면서 손뼉을 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준 수많은 우리나라 선수들의 피와 같은 땀에 경건한 박수를 보냅니다. 여러분 덕분에, 잘 될 수밖에 없는 사람, 으로 더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올림픽입니다. 부디 건강하게 잘 돌아오셔서 더 큰 무대에서 성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전 19화 #자존심과 행복 방정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