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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Oct 07. 2022

주례의 자격


어제 사무실로 한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화기 액정을 들여다보니 같은 번호의 부재중 전화가 이틀동안 여덟 개가 찍혀 있었습니다. 얼른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2003년, 스무 살인 첫 아이가 태어나기 일 년 전 졸업한 제자였습니다. 성인이 되고는 교생 때 다시 본 후 한참을 잊고 살던 제자입니다. 전화를 해서는 다짜고짜 내가 주례를 봐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요즘도 주례 보니?"


그랬더니,


"제가 올해 서른여덟이에요, 선생님. 나이도 있지만 여고 다닐 때부터 만약에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된다면 주례는 꼭 선생님께서 해주셔야 한다고 혼자 다짐했었어요. 그래서 뜬금없지만 전화드렸어요"


"야, 그래도 선생님 나이가 이제 막 오십을 넘었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더니, 


"아, 일단 선생님 내일 오후에 찾아뵐게요." 하고는 또 다짜고짜 시간 약속을 잡아 버렸습니다. 


사무실 전화를 듣고 있던 동갑내기 동료 교사가 놀립니다.


"윤선생님, 주례예요? 어 아직 너무 어린데?"


"맞아요. 나 아직 너무 어린데......"


어제 퇴근하고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 동공이 커집니다. 그 동공 속에서 읽었습니다. 직업적인 특성이 있지만, 참 세월 빠르게 간다라고 느끼는 것을. 피곤해서 입술에 물집이 잡혀 있는 아내를 보면서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나 주례 봐도 되겠어?'라고. 나에게 눈으로 끄덕입니다. 열일곱 딸은 나를 따라 결혼식장에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우리 부부 결혼식 때가 떠올랐습니다. 얼떨떨한 상황에서 어떻게 결혼식이 끝났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주례는 교수님이 해주셨습니다만, 주례사가 딱히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제 상태가 문제였던 거지요. 그때가 서른둘. 나에게 주례를 부탁한 이 늦깎이 부부는 더 그럴 거라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남녀공학이 된 제자의 모교를 떠나 다른 곳으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 제자는 이곳을 수소문해서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안 되는 여고 졸업생들 중 목소리만 듣고서 복도를 줄행랑치던 모습, 버건디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고 깔깔거리며 서로 어깨를 치던 '단발머리 그 아이'가 불쑥 떠오르는 건, 직업병에 가까운 기억 때문입니다. 


운전도 못하면서 택시로 한 시간을 달려 학교 앞까지 찾아왔습니다. 마흔이 다 되어가지만, 나와 같이 나이 들어 가지만,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뛰어다니던, 열정적인 그 아이는 여전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울컥하면서 커다란 눈망울에 금방 울음이 들어차는 것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 그 아이 옆에 있던 아이들도 마구마구 떠올라 그리웠습니다. 


돌려보내고 내려간 언덕을 다시 올라오면서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나무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예쁜 제자 얼굴 한 번 보러 간다 생각하고 가보자고. 평생 주례는 처음이지만, 나를 아름답게 기억해주는 이의 과거를 보존시켜 주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그 기억이 나의 아름다운 추억이니까요. 주례의 자격은 딱 하나, 좋은 사람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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