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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an 02. 2023

스토리는 사기다

                           사(람 사귀는) 기(술)

  오늘 우리 반 학생들 34명 중 8명만 등교를 했습니다. 3명은 수시합격생 중 킹 오브 범생이들. 그리고 다섯은 정시 접수를 위해 마지막 날 나를 찾아온 아이들이지요. 오늘이 대입 정시 마감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이 졸업식. 올해로 스물네 번째 맞습니다. 새해는 시작되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지난해네요. 이렇게 또 한 해를 넘기면서, 아이들의 졸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스무 해 넘게 보냈던 아이들이 교실에서 수업으로 힘들어(?) 할 때, 녀석들 눈빛이 애처로울 때 건네는 3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우리의 추억은 스토리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그때 그 사람과의 향기, 맛, 냄새, 촉감.... 진솔한 스토리는 사기입니다. 사람을 사기는 기술. 아이들이 그 기술을 잘 나누고, 배웠으면 하는 바람으로....


  첫 번째 이야기. 중학교 3학년때의 빨간 벽돌사건입니다. 시골 중학교는 고등학교와 운동장을 같이 쓰는 구조였습니다. 운동장을 바로 보고 있는 건물이 고등학교, 숨은 듯 뒤쪽에 나지막하게 있던 건물이 중학교. 그 맨 뒤가 수세식 화장실. 중3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 모르는 키 작은 동급생이 날 찾아왔고, 나는 수세식 화장실로 불려 갔습니다. 시골 애들끼리 의리 의리 하면서 만든 써클에 들어오라는 협박 장소였습니다. 물론 지금은 동아리 활동을 써클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라떼는 패거리 활동이었지요. 당연히 거부를 했고, 한두 번 더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고등학생이 피고 있던 담배로 왼쪽 손등을 지졌습니다. ’담배빵‘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은 왼쪽 손등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보다는 허술(?)했던 시스템 탓이겠지 싶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학교에 알렸는데 특별한 효과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이 더 커졌지요 - 물론 지금은 시스템상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폭력 상황은 꼭 신고해야 합니다. 지금은 경찰이 바로 개입하니까요 - 그러던 어느 날 다시 그 키 작은 똘마니 동급생이 찾아왔습니다. 학교 끝나고 어디로 나오라고. 안 나오면 죽는다고. 두려움에 어쩔 수 없이 동네 야산아래 있던 KBS 라디오 방송국 아래로 나갔고,  중고생 여럿이 모여 있었습니다. 동급생들도 꽤 있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폭력을 쓰기 시작했고, 나는 많아 맞다가 쓰러졌습니다. 정말 많이 맞았고, 이러다 죽겠다 싶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 올랐습니다. 살아야 한다,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주변에 보이는 붉은색 벽돌을 들었습니다. 3분의 1은 떨어져 나가 있었습니다. 엎드려 있다 일어나면서 그것을 주워서 휘둘렀습니다. 누군가가 괴성을 지르고 쓰러졌습니다. 마침 트랙터를 타고 동네 아저씨가 지나갔습니다. 그 아저씨게서 삼지창 같은 농기구를 들고 달려와 주셨습니다. 이후 당시 삼백만 원의 치료비를 부모님이 오랫동안 물어줬습니다. 그 후부터 부모님은 잦은 부부싸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고, 덕분에 원하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중학교 때는 아침마다 선생님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조회전 대략 20분 남짓. 그 시간마다 나는 교실 앞에서 반 애들한테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담임 선생님 - 지금은 은퇴하시고 춘천에서 사십니다. 어제 새해 인사를 전화를 드렸는데, 소주 한잔 하시자는 목소리가 여전히 카랑카랑하십니다 - 의 지시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그 덕분에 더 수학 공부를 신나게 했었습니다. 친구들의 가르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뿌듯헸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가르치는 걸 해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바닥이 금세 드러났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은 차원이 달랐고,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가장 낮은 성적 때문에 고민이 컸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수학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풀면 풀수록 불안했고, 초조해졌습니다. 수학을 시작으로 성적은 바닥을 쳤습니다. 중학교에서는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세 자리 석차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고1 2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일어 벌어졌습니다. 다음날 있을 수학시험공부를 밤을 새워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풀이과정을 외웠습니다. 아침에 일찍 학교를 가서 다시 수학공부를 했습니다. 1교시에 시험지를 받았습니다. 1번, 2번, 3번. 어느 문제 하나 풀리지 않았습니다. 3문제에 시험시간 50분 중 15분이 흘렀갔습니다. 당황되기 시작했습니다. 온몸에 열감이 일어났고,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감독선생님이 깨워서 일어났습니다.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온몸이 전기가 흐르는 느낌을 갖고 일어났습니다. 전기충격을 주는 의자에 앉은 기분이었습니다. 시험은 5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서술형 7문제는 0, 1, -1 같은 엉뚱한 숫자만 써넣고, 객관식 13문제는 모두 찍었습니다. 결과는 100점 만점에 8점. 전교 꼴찌. 아킬레스건이었던 수학을 지금처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에 모든 문제를 순번대로 학생들이 풀게 하고, 풀면 자리에 돌아가 앉고, 못 풀면 의자를 책상밑으로 넣고 의자뒤에 무릎 꿇고 앉아서 설명을 들어야 했던 수학수업.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총점으로 대학을 갔으니까. 정석을 외우다시피 했고, 1990년 역대급으로 어려웠던 학력고사 수학시험에서 55점 만점에 28점을 받았고, 그 덕분에 대학에, 사범대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반에서 3번째 높은 점수였습니다. 아킬레스건이 합격의 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못된 마음을 가진 저의 악다구니를 받아 준 한 선생님 덕분입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주, 작은 북채를 늘 들고 다니시던 수학선생님.  수학선생님은 내 시험지를 북채로 뚫어 덜렁덜렁 흔들면서 들고 들어왔습니다. 콩콩거리는 심장이 예상한 대로 나를 불렀 세웠습니다. 나는 불려나갔고, 북채로 어깨를 꾹꾹 눌르면서 모멸감을 줬습니다. 나는 반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채에 밀려 뒷 게시판까지 갔다가 다시 앞 머리채를 잡혀 끌려 왔습니다. 다시 밀려나가는 순간, 팔을 휘저으며 저항했고, 그것 때문에 교무실에 불려가 당구 큐대로 10대 넘게 매를 맞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학은 더욱 공포의 시간이 되었지요. 그 이후부터 수학만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맞은 그날, 시내 서점에 가서 출판사별 수학문제집을 다 샀습니다. 어려운 문제집까지. 그리고 모조리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외운 문제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하나 골라 A4에 옮겨 적었습니다다. 그걸 들고 교무실에 그 수학선생님을 찾아가 질문을 했습니다. 그걸 거의 매일, 대략 6개월을 했습니다. 하지만 못된 학생보다 그 수학선생님이 더 대단하셨습니다. 한번도 질문에 포기하지 않으셨고, 잘 풀어주셨다. 


  세 번째 이야기. 고등학교때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하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복도에 모의고사 전국석차를 100등까지 게시되는데, 3년 내내 한번도 게시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전교 120 몇등이 가장 높은 등수였습니다. 고1때 담임은 우리 고등학교 선배였습니다. 게다가 하숙생인 저와 같은 동향이셨습니다. 그렇게  명문고라는 이유로 나의 방황은 정신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보내 준, 하숙비와 용돈을 모두 주머니에 집에 넣고 시내로 나갔습니다. 야자를 처음으로 땡땡이 쳤습니다. 휘황 찰란한 가로등 밑 잠겨 있는 교문 대신 어둑한 소각장 쪽 담을 넘었습니다. 슬리퍼를 끌고 돌아다니다 들어간 곳은 영화관. 그 당시에는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고 계속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이었습니다. 2개의 영화가 순서대로 돌았습니다. 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들렸습니다. 어떤 영화였는지도 기억에 없습니다. 10시가 넘어 극장을 나왔습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비를 맞고 한참을 터덜거렸습니다. 걸어가는 내 앞에 누군가가 우뚝 가로막아 섰습니다. 담임이었습니다. 담임에게 이끌려 갔습니다. 담임의 자취방이었습니다. 벽에는 낮에 입고 왔던 양복이 엉덩이 부분이 엉거주춤 구겨진 채 마구 걸려 있었습니다. 부엌에서 라면을 끓여 내와 먹으라고 했습니다. 담임은 그 사이 소주를 마셨습니다. 나도 한잔 줬습니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담임은 소주를 마시면서 자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대부분이 나의 고등학교 생활과 많은 부분이 겹쳐졌습니다. 비슷한 고민, 비슷한 노력, 비슷한 결과. 자극이 되기보다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몰입했습니다. 모든 것을 끊고 공부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여간해서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담임과 같은 교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 목표는 나의 사명처럼 여겨졌습니다. 꿈이 없던 아이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별거 없지만, 그 사람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들어 줄 수 있는 감정 연습, 공감 연습을 위해서라도 교실에서는 계속 계속 스토리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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