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an 10. 2023

이해에 대한 이해

당신을 그리워하며

[2023-01-10_04:45...


여기저기서 들리는 공통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분명, 폭력적인 수준입니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만을 먹어도 그럽니다. 

오늘은 뭐 먹지를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걱정하면서도 그럽니다. 

아주 가까이에 모여 있어도 그럽니다. 하루 넘게 비행기를 타고, 갈아타고, 모여도 그럽니다. 

자면서도 그럽니다. 돌아다니면서도 그럽니다. 서서도 그러고 앉아서도 그러도 먹고 마시면서도 그럽니다. 

일할 때도 그럽니다. 쉴 때는 더 깊게, 자주 그럽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겪어 본 후에도 그럽니다. 

나도 그러고 화려한 매체들도 글도 그럽니다. 온 세상이 그럽니다. 

어쩌면 평생을 그럴지도 모릅니다. 



위대하고, 거대하고, 너그러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재력, 체력의 차이도 아닙니다. 외향적인지 내성적인지, 도전적인지, 안정지향적인지의 문제 역시 아닙니다. 혼자와 여럿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거침없이 던지는 변명입니다. 그 던지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그 방식에 대해 우리는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를 물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같은 유형이라고 좋아하고, 친근해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유형이라고 밀어내면서 편견도 선입견도 고집도 아집도 아니라고 주장할 뿐입니다. 우길뿐입니다.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네'












묻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묻습니다. 나는 내가 잘 이해가 되는지. 나의 모습을 정확하게 알고 나의 사정이 제대로 해석이 되는지. 

잘 생기고 못 생긴 건 운명이라고 해도,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방식, 나의 다짐, 나의 습관들에 대해서. 물론 평소에는 생각지도, 평생 한번 보지도 못한 '성인'들을 끄집어내어 나 자신과 구별 짓는 건, 아주 인간적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나 자신에 대한 몰이해에 투명 비닐을 뒤집어 씌우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다 보입니다. 나만 안 보일 뿐이지요. 보이지만 말을 못 듣는 경우가 더 많을 뿐입니다. '성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입니다. 우리는 인간계에서 만난 거니, 인간계에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일상의 성인이니까요. 어른이니까요.



생물학적으로 모두가 한번 태어나 한번 갑니다. 진리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처음입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오래전 카피에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모든 게 처음입니다. 

처음은 시한부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도 다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나 자신도 처음입니다. 나의 다중적인 역할도 처음입니다. 나이면서 동시에 자식이고, 부모이면서, 밥벌이하는 이 입니다. 

진짜 '성인'이 스스로 나타나 나의 역할마다 점수를 매긴다면, 역할 가중치가 사람마다 다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모든 역할의 끝에서 만나는 합은 같습니다. 잘했다, 못 했다, 아쉬웠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냥 했다이기 때문입니다. 해냈다이기 때문입니다.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산다는 게, 살아간다는 게 그저 살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저냥 지금처럼 시작하면 사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막살고 싶은 생각 없이 잠깐 또는 한참을 막살기도 합니다. 살다 보니 막살은 겁니다. 하지만 살은 겁니다. 

시작할 때 잘 살고 싶은 생각 없이, 잘 살기도 합니다. 살다 보니 정말 잘 살은 겁니다. 막 살지 않았는데, 스스로 서운해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이끌려서 그렇게 살은 겁니다.

둘 다 그렇게 사는 게 편해서 잘 살은 겁니다. 하지만 역시 살은 겁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산다는 건, 막 살지도 잘 살지도 않은 그런 삶입니다. 

밋밋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밋밋한 삶 속 마디마디마다 의미를 꼬깃꼬깃 부여하고 그렇게 살은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낸 겁니다. 

살아지는 게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순간이 나를 노크한다면, 참 운 좋은 삶인 겁니다. 그 노크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다 많으니까요.  


그러나 그 노크에 반응을 바로 하는 건, 알게 된 것과 그렇게 살아내는 건 또 다른 연결고리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열쇠 말입니다. 나와 나를 연결하고,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과를 연결하는 열쇠. 

내가 찾아온 그리고 주어진 역할들을 연결해 주는 그것. 

그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이제부터 나에게 남은 시간은 이해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만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는 시간으로 채우는 것만으로도 남은 시간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건 '성인'들의 몫이겠다고, 또다시 인간적인 변명으로 남은 삶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도 습관적으로 거울 속에 나를 집어넣습니다. 

나를 유심히 쳐다보다 보면, 내가 나를 잘 쳐다보지 못할 때가 많아집니다. 

다문 입이 말을 숨깁니다. 힘주어 뜬 눈이 마음을 숨깁니다. 강제로 윤을 낸 피부가 건강을 숨깁니다. 

정리된 머리카락으로 나를 가립니다. 

그리고는 잘하는 척, 괜찮은 척, 관대한 척하면서 나섭니다. 

이해에 대한 이해 없이. 

나를 먼저 이해하라는 끝이 뭉툭해진 창과 너를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종이 방패를 양손에 들고. 



                                                                                                              ... 06:11_2023-01-10]

작가의 이전글 오늘 뭐 먹지? 쓰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