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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4. 2023

유니크 플래이스

나의 공간 여행 ... 사진: Unsplash의Anastasiia Che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온 지 여덟 해. 몇 군데 집을 보러 다니면서 눈에 훅 들어온 집 중의 하나였다. 물론 예산, 일정 등의 조건이 아름답게 잘 맞아서 우리 집으로 결정을 한 것이지만, 나는 혼자 안방에 달린 베란다 때문에 마음이 더 끌렸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베란다가 상당히 넓었다. 그리고 바닥이 거실과 같은 높이로 이어져 있었다. 사실, 이 아파트가 분양될 때 아내와 함께 집을 보러 다녔었다. 그때 봤던 구조는 안방 베란다에 창가 쪽으로 붙어서 베란다 길이만큼 길게 네모난 블록이 만들어져 있었다. 화단이었다. 인위적으로 흙을 채워 자그마한 텃밭을 만들거나, 집안 화분을 주르륵 배치할 수 있는 구조. 그 당시에는 아마 획기적인 디자인이었지 싶다. 간이 텃밭을 광고하는 내용을 카탈로그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역시 예산, 일정 등이 맞지 않아서 이 아파트에 입주하지는 못했지만 입주 이후 많은 집들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안방 베란다의 화단을 덮거나, 아예 제거하는 공사를 많이 했단다. 


그런데 우리 집은 리모델링을 하는 과정에서 베란다 바닥에 폭신폭신한 마루 형태의 온수 패널을 설치했다. 전 주인장 부모님이 아마 목수 장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덕에 거실과 같은 높이로 베란다에 이어져 동선도 편하고 쓰임새도 매우 좋다. 그래서 이사를 오자 마자 아늑한 우리 가족만의 동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속에서 무엇을 할지 - 그때는 글을 쓰기 시작할 전이라 - 몰랐지만 그렇게 우리만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베란다 셀프 리뉴얼은 우선 페인트 칠을 위해 띠지를 틈마다 죄다 붙였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한데, 이런 작업을 할 때는 어디선가 모르게 기분 좋은 힘이 솟아난다. 아내가 극찬할 정도로 나는 자르고 붙이고 하는 게 좋다. 그렇게 냉장고도, 에어컨도, 싱크대 위아래 수납장도 분해해서 시트지를 붙이고 페인트 칠을 했다. 인덕션 벽면 타일 위에 주방용 알루미늄 내화 시트지를 발랐다. 이런 일을 하고 하면 잘한다, 잘한다, 고 아내가 두고두고 칭찬한다. 


이제 그만. 다시 셀프 리뉴얼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선 가장 먼저 해야 하고 중요한 게 베란다 페인트 색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미술적인 감각이 아예 없는 우리 부부는 그냥 밝은 화이트, 따뜻한 베이지 이러고 있었다. 그때 모두의 공감을 받은 이일 청춘 아드님의 한 마디. '잠이 잘 오는 공간으로 만들어야죠. 아늑하고'. 식구들 모두 이렇다 저렇다 반박, 아니 반대는커녕 '오~' '아~'만 외치면서 아드님의 의견대로 페인트를 구해 왔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유전자의 힘을 한 세대 건너 받은 아드님 덕분에 그렇게 쉽게(?) 가장 중요한 색을 결정했다. 


아드님이 유일하게 다닌 학원 중 하나가 미술 학원.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고입 전까지 다녔다. 입시 미술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취미로. 그림과 관련해서 대회도 나가고, 여러 작품도 그렸다. 집 입구 아트월에 벽화도 그려놨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할 때마다 앤이 반긴다. '오늘도 고생했어' 하는 듯 맑은 표정으로 토닥토닥거린다. 아내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드님의 손에서 벽화로 탄생하였다.  


우리 부부도, 남매와 함께 넓은 방 다 버리고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떠는 걸 너무 좋아한다. 잠도 같이 자고, 차도 같이 마시고, 맥주도 한잔 하고. 마치 남매 어릴 적 낯선 해변가 방갈로 앞에서 선셋을 보던 그 느낌처럼. 친구네 식구들도 최애 하는 장소중 하나다. 우리 집에 놀러 오기만 하면 아주 추운 한겨울 빼고는 사계절 내내 재수 씨랑 백 팔십이 넘는 장정 둘이 이곳에서 잠을 자는 것을 즐긴다. 온수 패널 덕분에 따듯하게 잠을 잘 수 있고 마루처럼 딱딱하지 않아서 좋아라 한다. 그렇게 아드님의 조언처럼 '잠이 잘 오는' 공간이 되었다. 13층 허공에 둥둥 떠있는 아늑한 슬립 캡슐이다. 아드님이 단박에 결정해 준 맬란지 그레이. 처음 보는 - 그때는 처음이었는데, 그 이후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면 가끔 볼 수 있는 색이었다 - 색감 덕분이다. 여기에 아내가 한참을 고르고 고르다 구입한 암막 커튼 역시 '잠 잘 오는' 공간으로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역시 아내의 손에서부터 하나둘씩 다양한 소품들로 채워졌다. 들어서자마자 맞은편 벽에 아내의 지인이 직접 그려 선물한 남매의 유화 초상화가 웃고 있다. 그리고 남매의 미소를 은은하게 밝히는 주광색 스탠딩 조명도 세웠다. 그 사이에 4단짜리 베이지색 철제 책장이 있다. 화분도 올리고, 책도 꽂아 놓고. 지금은 아내의 빨강머리 앤이 책으로 수첩으로 액자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공간의 쓰임을 확실하게 해주는 백미는 아내와 함께 종로 일대를 한참을 걸어 다니면서 발견한 가방 형태의 붉은색 LP턴테이블. 


물론 구입은 온라인에서 했지만, 그 영감(?)은 오래된 그 음악사에서 얻었다. 우리 부부는 LP보다는 CD세대이지만, 어릴 적 우리 집도 아내네도 커다란 전축 - 아내네는 모르겠는데 우리 집 전축은 태광 에로이카였다 - 에서 쿵쿵 울려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스피커 하나가 어린 나보다도 더 커서 거대하게까지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여기, 여기 조심하라며 볼륨을 높이면 살짝살짝 펄럭거리던 검은 천위에 일부러 귀를 가져다 된 기억도 난다. 그리고 리뉴얼하면서 LP판이 그렇게 비싼지도 이 공간 덕분에 알게 되었다. 책장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베토벤 소나타, 모차르트 콘체르토, 진추하 그리고 내가 추천한 비와 음악사이, 사이먼&가펑클 님들이 모여 있다. 


오래전 스웨덴 가구점에서 검은색 우드 테이블을 2개 구입했었다. 개당 2미터가 조금 넘는다. 딱 버티고 자리를 차지하는 식탁 대용으로, 남매들이 책 읽는 공간으로, 치팅데이 때 가족들이 주르륵 모여 앉아 스크린으로 영화를 함께 보는 용도로. 그러다 이 공간을 리뉴얼하면서 우드 테이블의 용도가 확실하게 정해졌다. 하나는 주방에서 식탁 및 일팔 청춘 따님의 전용 책상으로. 하나는 이 공간의 작업대로. 그렇게 이 공간은 2018년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새벽에 글놀이를 즐기기 시작하면서 잠자는 공간에서 잠 깨어 새벽을 즐기는 공간으로 180도 용도가 변경되었다. 직업의 특성상 여름과 겨울에는 교재를 만들고, 업무를 보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추위와 더위에 강하다. 산속에서 뛰어놀아 추위에 강하고, 유전적인 힘으로 땀을 잘 흘리지 않는다. 그 덕에 이 공간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나만의 공간이 되다시피 했다. 물론 그건 셀프 리뉴얼 이후에 자연스레 이루어진 공간 확보의 결과이다. 최근 일 년간은 허릿병 재활 때문에 우드 테이블 위에 전자동 키높이 책상이 추가되었다.  



우리 모두처럼 나도 언제나 공간에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꼭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날 심장이 마지막 박동을 멈출 때까지. 그 사이에 나는 항상 나만의 공간을 추구한다.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유니크한 그 공간 속에서 안전과 안정을 느낀다. 보람을 느끼고, 희망을 엿본다. 그 공간은 나를 안아주며 나의 삶을 물어봐 준다. 그래서 나만의 공간은 블랙박스다. 나의 냄새, 숨소리, 키보드의 움직임, 육체와 영혼의 흔들림,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다. 애써 나를 붙잡아 덜 흔들리게 만들어 준다.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나의 공간을 만들고, 다듬고, 사랑할 거다. 나의 토포필리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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