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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15. 2023

새로운 고등학교가 오고 있다

오늘을 오십 대 이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를 보낸 이들에게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진짜 친구야. 평생 가는 친구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같이 혼나고, 또 같은 이유로 신났던 공통된 추억들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오래전 영화 <친구>에 등장하는 세대는 아니지만, 저 역시 그 스토리의 어정쩡한 끝에서 다른 버전의 고등학교 이야기의 시작으로 이어지는 세대이지 싶습니다. 물론 고등학교만 그랬던 것이 아니지요. 세상의 패러다임이 기득권의 세상, 불투명한 세상에서 상식의 세상, 투명하고 안정적인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시작되는 흐름 속에 우리는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와 사회가 이어지는 그 통로의 어디쯤에. 일팔 청춘 따님이 놀리는 '아빠? 친구없지?'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 역시 그 흐름 어디쯤에서 만난 친구와 지금도 두런두런 삶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방황과 불안의 끝에서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 몸나이가 스물여덟에 시작된 사회생활에 올해로 선생 나이 스물다섯이 합쳐졌습니다. 그동안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고등학교는 교실, 담임, 친구, 공부, 열등감과 관련한 추억들이 방울방울입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소중한 추억.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기쁨에 행복에 감동도 뒤섞여 있지요. 먼저 간 제자들도 몇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없는 제자들도 몇이 넘고요. 교내 축구 대회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뛰어 준우승도 했었습니다. 몇 날 며칠 늦게 남아 합창대회를 하고, 깜짝 이벤트로 옆반 아이들이 시기 어린 부러움도 가득했었네요.


강원도 화천 폐교에서 한여름에 운동장에 돗자리 깔고 다들 드러누워, 새파랗게 총총한 별을 보기도 했고, 대부도 복지 시설에 위문 공연을 가서 춤에 노래에 장기자랑을 하며 환우들과 덩실덩실 춤을 추던 고1 아이들도 이제는 서른 아홉이 되었습니다. 소풍날 도자기를 굽는다고 입이 댓 발 나왔던 녀석들이 자기 작품을 만드느라 버스 막차를 놓치고 어둑한 몇 킬로 도로를 다 같이 걸었습니다. 그때 예정 시간을 넘기고 '사랑과 영혼'을 찍었던 아이 둘은 결혼을 하고, 이혼도 했네요.


합창 대회를 준비한다고 반대항 연극 연습을 한다고 떡튀순을 한가득 나눠 먹고, 양푼이에 비빔밥을 해 먹느라 온 교실에 챔기름을 처발처발 하기도 했네요. 수학여행 가서 2층에서 뛰어내리다 발목이 똑~ 한 녀석. 반 아이들 전체가 엉엉 울음바다 되도록 무섭게 호된 척한 적도 있고. 잘 배운 대로 시내에서 일반인 대상 캠페인 시위를 하겠다고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한 덕에 교장실로 경찰서로 뛰어 다니면서 설명하고 오해 풀고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또, 신입이었던 어느 해 만우절날 옆 옆 옆반 애들과 뒤섞여 앉아 신삥 담임을 혼란스럽게 했던, 그 덕에 전체 회의에서 무능(?)한 선생으로 지탄을 받았던 기억도 어제 같습니다.  


심심치 않게 자행되던 불시 가방검사. 어느 날 조회시간에 '자~가방검사 한다'라고 했더니, 우리 반 일짱 언니가 무의식적으로 가방 속 귀중품 하나만 건져 보려고, 2개비 피운 디스 담뱃갑을 탁하고 보란 듯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아, 흠칫 놀란적도 있네요. 그래도 이 언니는 속이 다 보이는 모범생입니다, 그저. 어느 해에는 영등포 모 호프집 골방에서 이쁘디 이쁜 우리 반 가출소녀를 구출(?)해 데려왔는데, 마주 앉은 카페 맞은편 내 앞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눈물 흘리던 충혈된 그 눈동자도, 실룩거리던 빨간 입술도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 지금의 삼 심대를 살아내는 어른들은 -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믿음으로 서로 토닥이는 방법을 알아서 익혔습니다. 아픔과 갈등 속에서 스스로 움츠려 보면서 삶의 방식에 대한 고뇌를 했습니다. 나보다는 남과 함께 도전하고 함께하는 가치를 막연하지만 간접적으로 익혔습니다. 같은 시간에 가도 비슷한 시간에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체력이 길러지고, 마음이 성장했습니다.


어느덧 교직생활 스물네 해를 지나 25년 차가 되었습니다. 참 세월이 빨라요, 빨라. 스물여덟에 은갈치 - 신입 일 년 차 때 그레이 정장을 자주 입고 다니는 나를 보고 어느 선배교사가 붙여준 별명입니다. 지금은 저보다 먼저 학교를 떠나고 옆에 없네요 - 때가 계단 몇 개 오르내린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동안 업무를 전담하는 역할을 여덟 해를 그리고 나머지는 담임 역할을 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업무는 남지 않아요. 그저 사람만, 어른이 되어 같이 나이 들어가는 아이들만 남지요. 여전히 저에게는 영원한 그때의 아이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고등학교 교실 속 추억들이 이제는 쉽게 재현되지 못할 거라는 불안한 징조가 슬슬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아래는 올해 고3 우리 반 학생들 시간표입니다. 교육과정 편제상 1인당 이수해야 할 과목이 총 11개입니다. 하지만 학생별로 선택 과목이 다 다릅니다. 5일간 스포츠 생활(체육) 2시간을 빼곤 모두 다릅니다. 스생 2시간을 빼고는 모든 학생들이 각자 이동하면서 수업을 듣습니다. 일정은 이미 대학생입니다. 게다가 같은 과목을 신청하였더라도 실제 수업은 여러 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지리를 선택으로 신청했더라도 실제 수업은 3학년 8반, 10반, 12반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과목이어도 다른 반에서 수업을 듣는 확률이 더 높습니다.

 


체육 이외에 두 시간이 더 있긴 합니다. 금요일 1교시, 4교시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역시 교과와 연계된 다양한 교육활동 행사, 학교 공식 행사, 의무로 해야 할 기초 소양 교육 시간 등으로 나뉘어 있어, 제대로 '우리 반'이라는 학급 공동체의 개념으로 기획하고 나누고 하는 시간으로는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리적으로 모여서 추억을 만들고 질서를 다듬고, 사랑과 우정을 배울 시간이 부족합니다.


담임인 나의 수업을 1시간이라도 듣는 아이들이 일주일 내내 듣지 않는 아이들보다 적습니다. 오전, 오후로 십분 정도씩 얼굴만 잠깐 봐야 할 상황입니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담임의 수업을 한 시간도 받지 않는 우리 반 제자들이 훨씬 더 많아진 것입니다. 자주 봐야 할 얘기도 있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도 있는 순리가 형성되지 않는 그런 학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시스템의 구조적 변화는 사람들의 생각을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특히, 이십여년전의 고등학생과 지금의 고등학생은 물리적인 나이만, 공부를 해야하는 나이라는 묵시적 합의만 유효할 뿐 정체성 자체가 많이 다르니까요. 생각하고 결정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가치관, 세계관, 직업관 등 삶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확연히 다르니까요. 물론 이런 흐름이 나쁘고, 좋다고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교육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된, 아니 학교의 태동 때부터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형성이 우리와는 달랐지요.


교사와 학생이 모두 각자의 객체로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펼치고 실천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 동반자 관계였으니까요. 우리도 이제 그렇게 가자고 하는 겁니다. 갑과 을의 관계를 지워나가면서 자신의 삶을 꾸리고 준비할 수 있는 공적인 영역으로 업그레이드 하자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긍정적, 부정적 추억 속에 존재하는 학교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달리져야 한다는 데 이 글의 방점이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인식말이지요. 그 변화와 우리 모두가 변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글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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