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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26. 2023

에피타이저 공부법

먹고 사는 여행...사진: Unsplash의Rayson Tan

벌써 2023년 3월도 마지막 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시간 참 빠릅니다. 플랭크 5분은 힘든데 한 시간은 찰나입니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느릿한데 하루는 금방입니다. 발표 전 하루는 답답한 데 한 주는 후다닥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3월보다는 매년 2월이 훨씬 더 빠르게 지나갑니다. 학교의 3월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듯 낯선 시기입니다. 부모도 학생도 교사도. 모든 것들이 새롭게 꾸려집니다. 낯선 만남의 연속입니다. 새로운 기준이 한꺼번에 적용되기 시작입니다. 서로의 기준을 제시하다 무너지고. 다시 제시하고, 타협하는 한달입니다. 


지금의 고3은 특히 그렇습니다. 마지막 기회(!)이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이 불안과 예민에 뒤섞여 더욱 그렇게 부채질합니다. 매년 3월을 지나 4월 중순까지도 이어집니다. 학생 한명 한명과의 개별 상담, 학부모와의 상담이 야간까지도 계속 이어집니다. 지금은 사라진 '사랑합니다.고객님'이란 멘트, 요즘의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라는 당부의 소리뒤에 계신 분들이 존경스럽고, 걱정되는 이유입니다. 계속 말을 해야 하니 우선 체력적으로도 힘이 듭니다. 정신을 잘 챙겨도 혼이 빠져 나갈 것 같은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스물 몇번의 3월을 보내면서 3월을 여유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한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오래 전 퇴임을 한 은사님의 조언이 먹고 사는 데 나침반이 됩니다. 3월에 바쁘면 삼류, 2월에 바쁘면 이류, 1월에 바쁘면 일류라고 늘 저를 다그치셨습니다. 삼류여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던 제가 이제서야 뭐, 일류는 아니더라도 이류 정도의 언저리에 머무리는 그런 교사가 되어가는 것 같은 이유가 다 은사님 덕분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3월에 허둥거리는 삼류 교사가 되지 않도록 2월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합니다. 


모든 셋팅이 한꺼번에 같은 기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업무적 특성상 3월에 쏟아지는 업무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학교는 학생이 있어야 해결되는 업무가 대부분이니까요. 개인적인 성향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업무 이외에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필수 업무를 미리 정리해 두는 겁니다. 그게 바로 수업과 평가 그리고 담임역할과 관련한 업무들입니다. 월요일 9시부터 금요일 4시 반까지 총 35개의 수업이 있습니다. 그 수업중 내가 들어가야 하는 스무 개 남짓한 수업이 물리적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업무입니다. 


고3 수업은 무게감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부담으로 작동합니다. 엄청난 학습량을 7월이 다가기 전까지 끝내야 하는 거니까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온 힘을 쏟아 부어 올려야 하는 마지막 성적니까요. 거기에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기출문제 분석'입니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문제 투성이의 두꺼운 책자속에 있는 트렌드 분석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제된 연도를 기준으로 묶어 둔 문제가 대부분입니다. 몇년도 몇회 기출 분석인 식이지요. 그래서 2워러 한달 간 가장 심혈을 기울이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시중에 이미 두세 종류의 책이 묶여서 판매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량이 많다고 해도 최근 몇년치 정도이지요. 그래서 해당 주제별로 기출 유형을 분석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2월은 새롭게 가르쳐야 하는 과목의 기출 문제를 연도별이 아닌, 주제별로 분류하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무지막지하게 양이 많고 시간과의 싸움인 영역입니다. 그래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영역입니다. 하루 몇시간을 해도 2-3년도치를 해결해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안절부절하는 고3 아이들에게 힘을 주려면 제일 필요한 자료입니다. 기출문제는 이미 출제되었던 문제이지요. 고3이 되어 '공부를 한다'는 건 학습 내용을 익힌 후 기출 문제를 풀어 보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고3때 '공부를 잘 한다'는 기출문제를 꼼꼼히 많이 잘 풀어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출제되었던 문제를 통해 스스로가 알고 있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 쉬운 부분과 어려운 부분, 해도해도 잘 안되는 부분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공부 소재가 되는 겁니다. 


그 소재는 각 시도 교육청, 교육방송,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홈페이지에 연도별로, pdf로 일목요연하게 아주, 아주 잘 정리가 되어 세부 교과목 별로 공개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다운받아 수업용, 학습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런데 이 부분이 참 한국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공적으로 방문했던 여러 선진국 학교나 교육기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시스템이거든요. 기출문제는 교사 개인의 컴퓨터 폴더안에 있는 정도지요. 물론 그보다 우리처럼 다섯개중에 하나가 반드시 정답이어야 하는 식의 평가 문항은 잘 만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엊그제 목요일이 올해 첫 모의고사날이었습니다. 우리반 스물여덟 아이들이 고3 티를 처음 내는 날이기도 합니다. 기출문제는 전국연합학력평가(이하 학평)가 있고, 대수능 모의고사(이하 모고)가 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이 있습니다. 이를 고3을 기준으로 실시하는 시기별로 나열하면 3월, 4월, 6월, 7월, 9월, 10월, 11월입니다. 그래서 제 폴더의 파일에는 2022_11_hanji, 2022_11_hanji2... 이런 식으로 파일명을 만들어 저장되어 있습니다. hanji는 고3 한지(한국지리 과목을 이렇게 줄여서 잘 씁니다), hanji2는 고2 한지 기출문제라는 의미입니다. 2022_11_hanji-ex라는 파일명은 기출문제에 대한 정답과 해설 파일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보면 만점 받고, 1등급 받는 학생들이 교과에서 분류한 소주제만도 이 단원, 요 주제에서는 이런 문제 유형으로 나온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유일무이한 최선입니다. 적어도 한국식 대입에서는 말이죠. 그래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학기중에는 거의 불가능한 작업입니다. 


이렇게 내가 기출문제 분석에 심혈을 기울이는 현실적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지금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국영수의 비중이 매우 높습니다. 오래전 학창시절과 비슷하지요. 그런데 입시에서는 주요 대학 주요 학과에서는 '3합 5' 식으로 최저등급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지원하고 수능에서 일정한 등급 이상이 확보되면 합격하는 조건부 지원이지요. '3합 5'는 국영수탐구(일반고에서는 사회과목 계열, 과학과목 계열 등이 탐구과목으로 분류됩니다)중 3개 영역의 등급합이 최소 5등급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탐구 과목에서 높은 등급을 받을수록 국영수 등급에 여유가 생기지요. 


그래서 내 교과를 선택한 아이들에게 기출문제 분석 자료를 활용하여 수업을 하면서 이렇게 일러줍니다. '탐구과목은 국영수의 에피타이저다. 메인 요리를 먹기 전에 에피타이저로 속을 다루는 것처럼 매일 삼십분씩 먼저 공부를 하고 국영수에 푹 빠져라. 이 과정을 반복하면 현실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공부를 하는 거다. 든든한 보험을 들어 두는 거다. 단, 학생일때만. 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질적으로 높은 삶을 영위하려면 국영수탐보다는 음미체니까!' 


그런데 기출문제를 소주제별로 나누다 보면 그 문제가 그 문제입니다. 무한 반복 재생같습니다. 가르치는 이어서가 아닙니다. 몇회분을 시기별로 나눠서 반복하다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주제에서는 이걸 물어보는 게 정해져 있다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인생사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가족 상담소 광고 문구에 '백가족 백가지 정답'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가학직커나 - 가족, 학교, 직장, 다양한 커뮤니티 그리고 나 자신 - 가 다 사정이, 상황이 다른게 맞습니다. 


첫 모의고사에 임하는 스물여덟 아이들의 눈빛, 태도, 목적 등이 다 다르듯이. 눈빛으로 시험지를 뚫을 것 같은 치대 지망생 A앞에서 미용사가 되고 싶다는 B는 시작 10분이 채 되지 않아 엎드립니다. 아이돌 데뷔를 앞둔 C는 그보다 조금 더 버티다 엎드렸습니다. 어제도 분명 자정 다 될때까지 춤연습, 노래연습을 했을 겁니다. 물리치료사가 되고 싶은 착하디 착한 D는 A의 대각선에서 끝까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또 다 비슷한 문제로, 다투고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해 내면서 그렇게 살아내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밑바닥에서 크게 작용하는 인간적 원리가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그 원리의 양념이 양보, 배려, 용기, 지지, 인정, 감사, 상식이지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어마어마한 작업이지만 그래서 신이 납니다. 기출문제는 이미 출제된 '정답' 있는 문제니까. 아이들이 이 과정을 지나 닥쳐 올 그 다음 문제들은 기출이 있는 듯 없는 듯 하잖아요. '네 탓 내 탓'하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스물 하나 아드님의 고민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아둥바둥하고 있나 봅니다. 결국은 그 답은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때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요. 스무살을 두번 반 가까이 지나가고 있는 아비의 입장에서 보면 그때의 내가 떠올라 기특하기만 합니다. 언제 저렇게 근본적인 자문자답을 하는 나이가 되었을까 대견합니다. 그러면서도 짠한 마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스무살보다 아들의 스무살이 훨씬 더 어려워 보입니다. 먹고 살기 어렵고, 사람답게 살기 어렵고, 세상이 어려워져 있습니다. 


오래전 그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 공감했던 드라마의 대사가 늘 맴돕니다. 하찮은 기억력을 믿지 못해 다시 보고 되새김을 해 봅니다.


'앞을 보면 가야 할 길이 하염없이 남은 것 같지만, 문득 돌아보면 꽤 먼거리를 걸어 왔음에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그 걸어온 길의 거리가 뿌듯하게 자랑스러울 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만만찮은 거리에 좌절할 수도 있다. 내가 걸어온 이 길이 후회가 될지, 보람이 될지 길의 끝에서나 알게 되겠지. 그저 걸을 뿐이다.-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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