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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r 22. 2023

균형의 종말

사진: Unsplash의Loic Leray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중학생 이후 집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동네에서 사회에서 만났던 어른들에게 참 많이 들었던 조언이 있다. 살아가면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균형 잃지 않기.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일맥 상통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인간관계의 대상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바람직한 어른들의 바람직한 조언은 대부분 삶의 경험치가 반영된 진심이다. 이 조언들이 내포하는 공통된 요소는 하나다.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틀을 가진 구조. 그 구조속의 존재하는 행위 주체자로서의 개인이 사회 구조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 주체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사회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개인의 균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정체성에 균형 유지는 당위성으로 사명감으로 삶 속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검증 절차 없이 내가 우연히 속하게 된 작은 공동체(이하 가학직티) - 가족, 학교, 직장, 거주하는 동네에서의 커뮤니티 활동 등 -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균형 유지를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쓴다. 돈 주는 사람도, 돈 받는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늘도 균형을 잃지 않으려 무의식 속의 외줄 타기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게 균형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렇게 하는 게 내 마음이 편하다, 고 치부한다. 내 자리를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구분하는 건 대입을 위한 진로 상담 언저리에서 멈춰 있은 지 오래라고 여긴다. 먹고살기 위해 좋아하는 것을 밀어둔 경우라면 그나마 낫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니까.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우리의 사회화 과정을 살펴보면 일방적 균형 감각은 마치 모태 신앙과 같이 우리의 생각이 되었다. 그 생각이 언제부터 나의 생각이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아니, 고민을 해야 한다고 고민할 여유조차 없이. 동일한 상황, 대상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도 문제라고 인식하는 지점과 정도도 다른 게, 다양한 게 옳다. 우리의 치우친 균형 감각 형성은 사회를 서로 연관된 부분들의 체계로 보고, 사회를 살아있는 생물 유기체에 비유하는 접근 방식의 영향이 크다. 가족, 교육, 경제 등 사회 제도가 상호 연관되어 있으므로 이 제도들이 이렇게 상호 의존적이라는 방식으로 사회를, 주변을, 나를 이해하는 데 익숙해진 이유이다. 가만 내버려 두면 그 가학직티가 알아서 자연스럽게 조화롭게 유지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접근이다. 


틀리지 않다. 이 접근방식은 사회 구성원 간 합의된 가치와 규범을 중요하게 여긴다. 사회를 비교적 안정된 체제로 전제한다. 그 속에는 개인은 사회 질서를 위하여 사회 속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전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고 사회화 과정에서 자연스레 교육된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조화란 누군가의 더 많은 희생과 헌신, 열정 페이가 녹아들어야 한다. 그게 나다, 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내가 속한 가학직티를 항상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는 곳이라고 여기는 접근 방식은 배우지 않았다. 왜? 갈등 자체를 터부시 하는 문화 속에서 자랐으니까.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라고 몸으로 느끼면서 자랐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가학직티에서 수많은 갈등을 통해 내가 나를 만나고, 성숙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화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을 체험한다. 그렇게 진화된 사회화의 경험치가 쌓여 간다.


가학직티에서 갈등에 대한 막연한 회피, 두려움이 옅어지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기득권, 집단 이익, 지배 구조, 갑을 관계 등에 건강하게 논의하고 실천적 대안을 제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나누고, 글을 나누다 보면 그 경험치가 훨씬 더 선명하게 내 것이 된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간의 개별적 상호작용이 그들의 행위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몸짓, 말, 이미지는 물론 생각, 신념, 가치관 등 행위 주체들이 내뿜는 상징들에 집중하는 힘을 가지게 디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가학직티 그 어디에 소속되어 있더라고 결국 자신의 주관적 동기와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발산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게 된다. 각자의 삶에 각자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 속에서 삶의 동기를 기어코 찾아내어 살아내려는 인간의 힘을.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 속 자리 잡은 일방적인 균형 감각은 옳지 않다. 여기도 저기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무미 무취의 모호성, 오랫동안 학습된 적당한 안정감이다. 자기 색깔에 대한 불안함, 불확신의 반증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심취하는지 무엇으로 에너지를 얻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사는지,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를 이야기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자란 탓이다. 그냥 이겨내면, 버티면, 참으면 되는 줄 알게끔 훈련되어 온 결과이다.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하면 비정상이라는,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전체의 질서를 흔든다는 집단적, 정신적 린치의 결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다 달랐다. 그런데 단일 문화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신념에 가까운 자부심, 다양성, 인권, 복지라는 용어에 어울리지 못한 획일화된 교육, 정상과 비정상을 갈라치는 이분법적인 접근 방식에 의해 균형의 유지해야 한다는 외적 압박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화 과정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하는 것이 '안전'하고 그 모습 자체가 '자신'이라는 잘못된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살아내는 것이다. 가학직티에서 서로 묻지 않는 이유다. 중간이라는 건 뒤로 돌아, 뒤로 돌아를 반복해도 가운데라는 의미인데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모두가 한 방향만 바라봤을 때, 그때 중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는 여러 방향을 바라보는 게 자연스러워지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다행히 세상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는 있다. 요즘 세대들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구동성으로 우리 때는 안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고 치우쳐야 산다. 자기 삶을. 내가 평생 바쳐 온, 바치려 하는 균형 잡는 삶의 종말을 스스로 선언해야 한다. 중간만 가면 된다, 는 틀렸다. 너는 왜 그렇게 튀니, 는 폭력이다. 자기 색깔이 모호한 사람, 은 위험하다. 먹고는 사는 데 잘하는 게 없는 이유다. 먹고는 사는 데 좋아하는 게 없는 이유다. 가학직티에서 강요받은 집단적 가스라이팅의 결과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게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이 가스라이팅을 통해 자기편을 만드는 거다.


나도 모르게 왼쪽으로 더 많이 씹고 산다. 신발은 항상 오른쪽 뒷굽이 더 빨리 닳아 간다. 습관적으로 가방은 왼쪽으로 더 많이 메고 걷는다. 나의 시력은 오른쪽이 훨씬 더 세상을 또렷하게 들여다본다. 아내의 왼쪽에서 함께 걸어야 마음이 더 편하다. 오른쪽으로 누워 잘 때 더 잠을 깊게 잔다. 알아서 가야 하는 비보호 좌회전보다는 일단 멈추는 우회전이 마음 편하다. 나를 좋아하는 이와 내가 좋아하는 이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자식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항상 저울 양쪽에서 오르내리지만, 부모가 그랬듯이 자식에게 더 많이 기울어지는 나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편견과 편애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자신의 치우진 결과를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이 결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요하는 태도가 문제이다. 자신의 것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유형의 폭력이 범죄인 것이다.  


어느 영화의 대사가 떠오른다. '사람이 다 다르게 생겼잖아. 그 이유가 뭔지 알아? 다 다르게 살라는 거야. 다 다르게 사는 게 정상이라는 거야'. 가학직티에서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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