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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Feb 28. 2023

골목길

사진: Unsplash의Sigmund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었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저녁을 먹자고. 하지만 000선생님은 여전히 많이 바빴다. 그렇게 잡고 모인 날짜가 2월 20일. 약속 장소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2층 계단 끝으로 이미 익숙한 목소리들이 달려 나왔다. 뭐 이렇게 많이들 모였지. 몇몇의 모임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중간에서 장소 섭외하고 알려주던 후배 선생님의 문자가 기억났다. '000 선생님의 명퇴식'. 그곳은 거의 매년, 100여 명이 넘은 교직원들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곳이었다. 떠나는 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오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던 그곳. 10여 년 전부터. 


대형 리셉션 공간. 한 라인에 열몇 명씩 세 라인이 넘게 앉아 있었으니, 비공식 모임치고는 방학이 끝날 무렵이라는 걸 감안하면 많이 모였다. 그리고 옆으로 옮겨 간 맥주집까지도 거의 같은 인원이. 그렇게 000 선생님의 명예로운 퇴임식을 축하하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랬다. 그다음 날, 우리 따님이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과음을 했다. 많이 먹었다는 게 아니라, 술을 못 먹는데 먹었다는 의미.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많이 아쉬웠다.


2월 22일 오전 11시. 출근한 모든 교원들은 강당으로 모였다. 000 선생님의 명퇴식 참석. 나를 포함한 남겨지는 이들에게는 공식적인 업무 중 하나. 보통 명퇴식은 학년초 다른 행사에 이어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박수를 치는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지인들 몇이 아쉬움을 사적으로 달랜다. 그러나 이런 약식 절차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들도 많다. 나도 그럴 거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날의 학교 강당에는 남녀노소 낯선 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나중에 소개를 할 때 알았다. 000 선생님의 가족, 형제, 친구, 지인들. 구례에서 올라오신 여든이 넘은 노모. 그 노모의 동생, 친구. 장인어른, 장모. 군대 동기, 이전 2개 학교의 동료들. 성인이 된 졸업생. 그리고 재학생들. 내가 24년간 봐왔던 퇴임식과는 온도 차이가 많이 났다. 울컥했고, 뜨거웠고, 고마웠다. 


000 선생님은 15년 전, 처음 만났다. 첫 발령지에서. 짧게 자른 깍두기형 헤어 스타일. 검은 뿔테. 작고 짧고 두껍고 굵은 체구. 두툼한 눈두덩이. 두꺼비라는 별명이 있다는 걸 안 건 학교에서 처음 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말 잘 어울렸다. 담당 과목은 정보. 컴퓨터를 활용한 많은 세부 영역을 가르쳤다. 그리고 학생 동아리는 프로그래밍반, 로봇반. 과목 성격상 고등학교 2학년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2학년을 담당했던 몇 해를 빼고는 같은 학년에서 업무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학생과 관련한 사안이라면, 그게 좀 더 나아지게 끔 하자는 거라면 우리 둘은 의기투합하는 때가 많았다, 는 공통점을 이런저런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와는 점심을 같이 먹는 도시락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각자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모여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얻을 수 있는 사이.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 의기투합해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영역에서 수업을, 학생을, 학교를 조금이라도 좋게 변화시키기 위해 바쁘게 살았다. 나의 24년 교직 생활 절반 이상이 그 바쁨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흘러갔다. 예산을 학생들을 위해 열심히 받아와 열심히 키웠다. 다그치면서도 챙겨주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전국 대회, 세계 대회에 출전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그 결과로 수많은 제자들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이 두꺼비쌤 하면서도, 무서워하면서도 항상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 


000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 당뇨, 고혈압 등 성인병이 있다는 데 그렇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특히, 학교에서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주 긍정적이었다. '아님 말고'식으로 사안을 넘겨가는 모습이 나에게는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했다. 많은 에피소드를 함께 겪으면서, 소위 즐겁게 살아남는 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의 마음 한 구석에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만들어 준, 지팡이 같은 역할을 해 준, 참 고마운 64년생이다. 그래서 사석에서는 형님, 형님하고 부르는 걸 좋아하는 선배이다. 


000 선생님이 정년을 3-4년 앞두고 일찍 그만두는 이유는 노모. 몇 해 전 노부가 사고사 한 뒤 홀로 계신다. 전남 구례에서 소를 키우며 농사를 지으셨다. 그렇게 000 선생님은 76년에 서울로 홀로 유학을 했단다. 고1 때부터 타지에서 혼자 살았던 나였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고 강해야만 하는지가 느껴졌다. 퇴임식에서 000 선생님은 자신이 직접 쓴 짧은 편지를 읽었다. '한없은 인내심으로 버틴 30년이었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지만 그 순간이 행복했었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제 개학 없는  방학에 들어간다. 47년만에 고향으로, 엄마곁으로 돌아간다.'. 


나는 같은 일을 오래 하다 마치는 세리머니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넓고, 빠르고, 정신없고, 화려한 큰 도로에서 이제 조금 좁지만 아늑하고, 향기 좋고, 안전하고 소박한 자그마한 골목으로 들어선다는 느낌. 그래서 난 예전에도 지금도 골목이 좋다. 내 어릴 적 넓은 마당이 돌아보면 다 골목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모르는 동네에 가도, 다른 나라 여행을 가도 골목, 골목 돌아다니는 이유다. 너무 좋다. 골목. 나도 얼른 그런 나만의 향이 나는 그런 골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싶다, 는 생각을 이런 행사 때마다 하는 데 000 선생님 퇴임식에서는 앉아 있는 내내 밀려 올라왔다. 

 

사회생활하면서 밀려오고 밀려가는 건 순리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고 했던 것처럼. 빈자리가 유독 커져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함께 했었고, 친절했고, 건강했고, 잘했다는 점이다. 늘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나도 000 선생님처럼 나이 먹어 가겠다 싶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게 사명감이 된 것이지만 그 속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신나게, 건강하게, 나머지 기한을 잘 채워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하게 만드는 명퇴식이었다.  


앞으로 30년, 40년 더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강당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왔다. 옆에 따라 내려온 마흔 하나의 젊은 일꾼, ***선생님이 그런다. '와, 정말 많이들 오셨네요. 이거, 윤성관 선생님 퇴임식 때는 강당이 부족해지는 거 아닙니까'라며 너스레를 떤다. 같은 사회과 선배라고, 작년 전근 첫해에 옆에 딱 붙어서 참 많이 도와준 사람이다. 오늘 퇴근하고 내일 출근 안 하는 날이 나의 퇴임하는 날일 거라 했더니, 그런다. '에이, 그러시면 안 되죠.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전두환식으로 체육관을 가득 채울 테니까'. 우리 둘인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000 선생님이 참가한 전체를 위해 점심을 준비했다는 불고기집으로 향했다. 플렉스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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