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Mar 03. 2023

다 네 덕입니다.

2023년 3월 2일. 온 나라가 마치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하다. 라디오 멘트도, 뉴스기사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3월 학기제를 유지하는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자라나 부모가 된 이들이라면 더더욱. 특히, 학부모라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학교가 일제히 시작을 알리는 날이 기특하고, 대견하고, 후련하고, 안쓰럽고,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날아가는 첫날이기 때문에.


 스무 해를 넘게 반복하는 3월 2일이지만, 여전히 이 날은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일 년 중 가장 바쁜 하루이다. 마치 겨우내 쓰지 않았던 숨어 있는 근육들을 한꺼번에, 동시에, 모두 다 움직여야 하는 통증처럼. 정신이 없다. 커피는 고사하고, 물 한잔 먹을 시간도 없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니, 다녀왔나 싶을 때도 있다. 그렇게 스무 살, 열여덟 남매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한 일이다.


그런 아내가 지난주 가족톡에 심플하게 예쁜 메뉴판을 하나 던져 올렸다. '2023 점심 메뉴'. 올린 시각은 오후 11시 24분이었다.


첫날,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탠드 조명 하나만 조심스레 켜놓고. 그리고 그동안 모아 놓은 글감에 글감을 보태고 글도 정리했다. 한 시간 반 정도 흘러 6시가 조금 넘는데, '탁'하면서 주방이 환해졌다. 아내였다. 보통은 저녁을 즐기는 스타일이라 6시 반이 넘어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후다닥 나도, 따님도, 자기도 좋아하는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그렇게 도시락 세 개에 각각 다섯 개씩, 접시에 나와 따님이 나눠 먹으라고 따로 만들어 놨다. 그리고는 안방 욕실로 총총 사라졌다.


어제도 늘 그랬듯이 매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늘 카풀해서 내리는 곳에서 다시 나를 기다렸다. 올라 탄 차 안에서 그런다.  '오늘은 우리 따님한테 초집중하자고'.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작년 오늘. 따님은 한참을 우울하게 머물러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지만, 가보지 않은 길이라 두려움이 설렘을 밀어내고 있었다. 친구들의 입학 소식에 소리 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고, 우리 둘은 그 눈물 사이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는 둘 다 몸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 치듯 밀어 넣었었다.


그렇게 딱 일 년이 채워졌다. 고졸 검정고시 역시 집에서 혼자 준비하고 패스. 친구들이 '언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고 생각하고 살아라고 어릴 때부터 인상 쓰는 아빠를 타박하지만. 그래도 열여덟. 3월 2일, 고2가 된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나이다. 그렇게 우리는 피곤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따님이 좋아하는 플랙스한 중국집에서 볶음밥, 탕수육, 짜장면을 맛나게 먹었다. '레전드, 레전드'하면서 내가 시킨 게살X.O 볶음밥을 따님이 다 먹었다. 나오니 7시가 넘었다. 하지만 아내는 디저트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피곤한 얼굴로 내 눈을 보면서 넌지시 동공을 맞췄다. 그렇게 동네에서 제일 비싼, 최근에 오픈한 거대하고 아기자기한 카페에 갔다. 입구부터 하얀색 대리석 사이사이 주광색 조명이 예뻤다. 입구로 걸어들어만 가도, 유리문 안쪽에서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질것 같았다. 인별그램에서 아주 아주 핫하단다.


이번에는 일팔청춘이 내 동공에 넌지시 말을 걸더니 앙증맞은 샤인머스켓 타르트를 하나 주문했다. 일만오천원. 헉. 하지만 속으로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셋이니까, 미안하니까 음료 1잔을 더. 그러나, '당황한 듯한' 직원이 부탁했다. 1인 1주문이 아니라 '1인1음료 주문'이라고. 음료 2개를 꼭 더 주문해야 한다고, 교육받은 데로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하지만 삔또가 상한 따님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가자, 그냥 가. 타르트도 사지 말자'라고. 하지만 타르트를 버리는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그렇게 타르트만 포장을 했다. 그리고는 저녁 클래식 연주가 있는 곳, 지난번에 아내가 공연내내 즐거워 했던 쇼파, 그 쇼파에 다시 앉았다. 조용히, 조용히.

부드럽게 녹은 모짜렐라 치즈처럼 바이올린 선율이 큰 홀 구석구석에 늘어지고 있었다. 8시 정각을 알리듯 피아노 건반이 '당당'하고 눌리면서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수다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폰을 꺼내 음악을 듣던 따님이 화면을 보여준다. 지금 연주되는 곡이 피아노 연주곡 '목마른 사슴'이라고. 손으로 턱을 괴고 아는 척 하는 나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고 스마트하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나도 사슴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촉촉해졌다.


혼자 남은 늦은 밤에 2023년 점심 도시락 메뉴를 고민하고, 3월 2일, 일년 중 가장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도 예전처럼 얼른 집으로 뛰어 들어, 후다닥 침대위에서 몸과 마음을 던져 넣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 건 다 네 덕이다. 고집과 아집이라는 넓은 하우스를 두 채나 소유하고 있고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반려견과 항상 동행해 온 나를 이렇게 나마 쓰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온 건 다 네 덕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가족으로 힘들고, 사람으로 일로 힘들었던 상황에서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이 길도 다 네 덕이다.  


글을 쓰려다 보면 자주 가족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도 다 네 덕이다. 가족으로 살면서도 스스로 금기어처럼 묵혀 두었던 그 단어들을 슬쩍 꺼내어 나의 진심을 이렇게나마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도 다 네 덕이다. 아직은 이 글을 '썼어'하고 이야기하는 게 머쩍지만. 그래서 이렇게 글속으로 숨어 들지만 언젠가 이 글을 보게 될때는 지금보다 더 덕 많은 인간이 되어 있을거라 다짐한다.

  


한 줄 요약 : 고맙습니다.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께요. 아니, 시키기 전에 잘 할께요~


피에쓰;편견, 선입견이라는 반려견 표현은 나의 글벗, 필명이 같은 지담님의 글에서 읽은 후 계속 맴돌고 있는 문구를 빌어온 겁니다.

작가의 이전글 골목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