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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01. 2023

3월 2일

사진: Unsplash의Melanie Wasser

2월 끝자락을 부여 잡고 시작했던 올해 3월은 5주를 가득 채운 채 어제, 역사속으로 들어갔다. 참 긴 3월이었다. 약하디 약했던 학생들이 학교 대신 거리로 뛰쳐나와 나라의 해방을 외쳤던 그 날. 그날의 함성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다. 그 덕에 온 나라의 3월 첫날은 항상 2일부터다. 백년이 지난 지금 학생이란 역할에 충실한 모든 이들은 또 다른 자기 해방을 꿈꾸며 그렇게 3월 첫날을 시작한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지금의 어린 10대들도. 나의 그날도 그랬다. 


38년전 3월 2일 아침. 큰 도로에서 작은 도로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앉은 산아래 학교. 나는 그 곳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강원도의 3월 바람은 여전히 2월 초순이었다. 야산을 뛰어다닐 때도 그 바람이었지만, 그날 아침은 유독 차가웠다. 허여벌게진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처음 보는 교문을 들어서려다, 멈칫했다. 팔에 노란 완장을 찬 검은색 교복의 고등학생들이 마치 군인처럼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몸작고 마음조린 나는 그 사이로 빨려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의미도 몰랐던 '선도'라는 검은색 글씨조차 그 고등학생들처럼 유독 반듯반듯하게, 답답할 정도로 각지게 보였다. 한참 뒤 어른이 된 뒤에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찰을 들어설 때 양 옆에서 내려다보는 사천왕상을 지나칠 때마다 그 교문이 나의 깊숙한 무의식속에서 오버랩되곤 했다.


중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이었다. 거대한 5층 건물이 그렇게 내려다보는 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마구마구 걸어나가야 할 것 같은, 처음 듣지만 너무 익숙한 듯 한 행진곡이 건물 꼭대기 끝에 대롱거리는 커다란 깔대기 세 개에서 흘러 나왔다. 나를 놀리듯 입을 헤벌리고 키득거리는 것 같았다. 국기앞에서 맹세를 했고, 국가를 불렀고, 선서를 했다. 왜 하는지, 누구에게 하는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5층 건물이 나에게 달려 들면서 넘어질 것 같은, 그런 상상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얼었던 손은 녹을 줄 몰랐다. 그렇다고 주머니에 넣을수도 없었다. 아무도 넣지 않았기 때문에. 신입생 줄 앞에 한명씩 서 있던 선생님들은 유독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분들이 많았다. 그들의 표정은 정말로 비장했다.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기를 바라보는 어떤 선생님은 우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얼른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앞 친구를 따라 5층 건물 뒤로 돌아 들어섰다. 맨 앞 친구는 하얀 종이위에 검은색으로 1-1이라고 써 있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친구는 어떤 선생님을 놓치면 큰 일이 일어날 듯 바짝 붙어 졸졸졸졸 따르고 있었다. 뒤에서 봐도 가슴팍이 두껍고 손이 엄청 클것 같은 자그마한 선생님이었다. 5층 건물 뒤에는 4층짜리 건물이 숨어 있듯 서 있었다. 운동장에서 봤던 5층 건물보다 앙증맞게 작아 보였다. 그 건물 1층 복도를 주욱 지나 제일 끝 교실로 나는 들어섰다. 그 앞에 앞에 앞에 애들을 따라. 검은 가죽 점퍼를 입은 그 선생님을 따라. 교단위에서 교탁에 양손을 집고 우리를 내려보던 그 선생님. 유독 진한 눈썹은 길고 짧은 새치가 뒤섞여 지저분해 보였다. 양쪽 눈을 위로 들어올리 듯 삐죽거리고 있었다.  


가운데 줄 맨뒤에 앉은 나는 어디서 배운적도 없는데, 고개를 숙이면 안된다, 안된다고 주문을 걸고 있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그 지저분한 눈썹으로 이마를 밀어 올리면서 그랬다. '야, 너!'. 그게 나라는 건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저요?' 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퉁불퉁한 나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복도 나가서 유리창 깨진 게 몇개인지 세어 와'라고. '넵'하고 미리 합을 맞춘 배우처럼 복도로 튕겨나갔다. 몇 걸음되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씩씩해야 한다, 고 다짐하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지금도 산책할 때 가끔 만나는 우리 동네 아주머니처럼. 육십은 넘었을 거고 칠십은 안되었을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 횡단보도에서 신호대기를 하는 동안에도 양팔, 양다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 온 몸을 맞긴 듯 두팔을 하늘을 향해 벌린다. 양 다리도 적당히 벌린다. 그리고 몇십초 동안 팔과 다리를 춤추듯, 경련을 하듯 흔들어 댄다. 마치, 우리팀이 끝내기 홈런을 날렸을 때 환호하듯 그렇게 전율한다. 가는 눈길을 어찌 막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면, '요이땅'하듯 양쪽으로 벌렸던 그 팔을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면서 러시아 호위병처럼 과장된 보폭을 넓게 넓게 그렇게 걸어간다. 파워 워킹이라고 하나. 그 거의 딱 2배는 족히 넘게. 


그 날 나도 복도로 나갔다 들어오는 동안 그렇게 걸었던 것 같다. 양팔을 씩씩하게 앞뒤로 흔들고, 시키신대로 엄청 잘했읍니다, 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쫙 펴고. 그 선생님은 교탁위에 싸인 서류뭉치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내가 먼저 힐끔쳐다 봤지만 다시 눈이 마주칠까봐 이내 돌렸다. 그렇게 다시 교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으려는 데 내 옆짝이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면서 키득거렸다. '야, 너 군인같아?'라고. 그때 그 선생님의 시선이 내 왼쪽 귓볼 어딘가에 와서 박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야, 몇개야?'하는 쇳소리 섞인 카랑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네, 세 갯.....'하고 대답을 하려다 그만 '풉'하고 웃음을 삼켰다. 옆짝이 오른쪽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기 때문에. '야, 이 새끼야. 이리 나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시선을 얼른 주어 들어 선생님을 쳐다 봤다. 그 새끼가 다시 나라는 걸 이미 알았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저요?'. '그래, 이 새끼야. 안 나와' 그렇게 교탁앞에 섰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부터 발꿈치까지 가득히 채워지는 느낌을 받는 순간, 그 선생님은 '이 깨물어'라는 한숨섞인 신음을 짧게 내뱉었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를 깨물라고? 이 깨무는게 순간 어떻게 하라는 거지라고 혼란스러워 하는 그 찰나. 그 선생님의 거대하게 펼쳐진 오른손바닥은 나의 오른쪽뺨을 거칠게 감싸쥐었다. 그리고 왼손바닥이 나의 왼쪽뺨을 향해 돌진했다. 쫘~악 하는 소리가 마치 에밀레종 앞에서 들었던 울림같았다. 그렇게 두번 더 울렸다.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울고 싶었다. 그런데 울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절대 안된다고 다짐했다. '들어가'라는 외마디 명령에 너무나도 기뻐하면서 '넵,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감사하다고.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냥 감사했다. 따귀를 다섯번 아니고 세번만 맞아서 감사했을 거다. 빨리 끝나서 감사했을 거다. 다 나 잘되라고, 그렇게 나를 강하게 훈련시키려고 그 귀한 시간을 그렇게 사용하신 걸꺼라는 생각으로 감사했을거다. 그렇게 3월 2일에 학교라는 곳에서 그 이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따귀'를 맞았다. 꽁꽁 얼어 있던 열 네살의 깡 마른 내 몸 구석구석을 한꺼번에 뜨거워진 피가 마구 마구 돌아쳐 단박에녹여주고 있었다.   


분명 그때부터였을 거다. 내가 추위를 타지 않게 된 게. 그 후로 15년쯤 지난 1999년 3월 2일. 나는 교사가 되어 그 자리에 그런 모습으로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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