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Mar 30. 2023

  진짜 봄은 졸사로 온다

  단지 안 분수대를 둘러싼 벚나무 중 딱 한그루가 만개했습니다. 여기가 분수대야를 외치는 첨병 역할을 하는 성질 급한 나무인 듯 도드라집니다. 지나다니는 10대건 어르신이건 눈길을 떼지 못합니다. 아싸 봄이다 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봄은 눈과 코로 먼저 오는가 봅니다. 하지만 아직 반팔로 덤비기에는 역부족인 기온차지만, 벚나무 보다 더 성질 급한 아이들은 봄이랑 맞짱이라도 뜰 기세입니다. 반팔로 껑충껑충 농구 코트를 이리 리 뛰어다닙니다. 그렇게 학교 구석구석에 햇살이 넘쳐납니다. 햇살 덕분에 살짝 떠오르는 미세먼지조차도 탁탁, 반짝이며 튕겨 오르는 듯합니다. 어제, 그 좋은 날이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게는 수능보다도 더 중요한 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사진을 찍었거든요.



  과거의 우리 기억 속의 고3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한달살이를 하면서 봤습니다. 늘 편안한 츄리닝 아니면 학교 체육복을, 세수 안 한 듯한 얼굴을, 민낯을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중에 아직 열댓은 마스크를 벗지 않습니다. 삼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3은 비슷합니다. 몸에 장착한 스마트한 기기 정도가 달라졌을까요. 라떼는 상상조차 못 했던, 태블릿이 넘쳐나는 정도가 아주 많이 다른 교실 풍경입니다. 절반 정도는 이런저런 태블릿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속에 공부거리가 다 모여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고3은 고달픕니다. 잠, 공부, 유혹 이 세 가지를 유지하고 멀리하기 힘들어서 고삼인가 봅니다. 하지만 언제나 가방 한가득 책을 이고 지는 아이들도, 바닥만 보며 구부정하게 걷는 아이들도,  가방 하나 없이 달랑거리며 맨 몸으로 출근 같은 등교를 하는 아이들도 오늘 만큼은 모두 한없이 가벼워 보입니다. 조례를 위해 교실로 걸어가는 복도가 런웨이 하는 공간 갔습니다. 학급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남학생, 여학생들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웃고 있습니다. 그 웃음소리에 내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내 양 옆으로 인사를 하면서 나를 반깁니다. 손을 흔들면서, 눈을 맞추면서 걸어가는 짧은 그 길이 가득 봄길입니다. 그렇게 양치하는 공간에도 교실에도 너나 할 것 없이 거울 속으로 친구 속으로 미소와 함박 웃음이 가득합니다. 넓은 복도 가득 가라앉았던 눅눅한 공기가 오늘만큼은 마스크를 다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로 상큼합니다. 향수를 뿌린 듯 향긋하기까지 합니다.


  조례 시간. 우리 반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하얀색 셔츠, 버건디색 타이, 맬란지 그레이색 조끼, 도톰한 그레이색 자켓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한 달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네요. 계절은 봄이라지만 교실은, 고3 교실은 절반 정도만 봄이었습니다. 마스크에, 감기에, 비염, 장염을 달고 사는 아이들. 여전히 롱패딩을 입고 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가 마스크를 벗었습니다. 한 달 만에 얼굴을 처음 보는 아이도 서넛이 있습니다. 속으로 '우리 반인가' 싶습니다만, 그래도 모두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중3 때부터 돌림병으로 꼬박 3년을 학교다운 학교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올해가 처음 그 경험의 시작인 아이들입니다. 이제야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질문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입니다.  


  아침마다 아이들은 나에게 목례를 하고 '오늘도! 예쓰겠습니다'를 외칩니다. 그리고는 교탁 앞으로 걸어 나와 휴대폰을 제출합니다. 까탈스러운 래퍼 담임이 다다다다 열마디를 더 던집니다. 하지만 어제는 아이들한테 소곤거렸습니다. '얘들아, 오늘은 휴대폰 제출하지 마'. 그러자, 뭐 별일이라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마치 이십 년 전 월드컵 4강 진출 확정일 같습니다. 뭐 별일이라고. 물론 휴대폰을 걷고 안 걷고를 떠나 작은 규칙조차도 잘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작은 교실이, 세상이 잘 유지될 테니까요. '라떼는... 우유야'와 같은 싱거운 랩입니다.


  그깟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하면서도 '얘들아, 오늘 우리 반 휴대폰은 제출한 거야'라고 윙크를 날려야 하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윙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관계학적 독해력(?)이 부족한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흠, 흠, 우리 반끼리만 하는 오늘의 약속이라고. 유 가릿?' 해야 합니다. 이제야 다들 푸하하하합니다. 여하튼 열여덟 아이들 눈빛이 이글거립니다. 전의에 불타고, 고마움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 순간만큼은 끈끈한 전우애 마저 흐르는 듯합니다. 고3 일 년간을 다짐하는 숏영상을 찍어 올리는 게 졸사날 학급별 또 하나의 미션입니다. 반대항입니다. 미디어, 영상 분야 유학을 준비 중인, 아주 조용한 ㅇ이 졸사날 하루 캡틴입니다. 스물일곱명 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 구석구석에서 촬영하느라 신나 보였습니다.


  지금껏 보다 보니 졸업 사진 찍는 날, 아이들은 성능 좋은 휴대폰으로 그 과정을 찍는 걸 더 좋아라 하더군요. 메이킹 필름이지요. 사진사가 가져가는, 정형화된 사진보다 자기 폰, 친구 폰에 담겨 있는 사진들이 훨씬 더 의미 있지요. 한참을 프사에 올려놓고 끈끈한 우정과 진한 사랑을 과시하는 용도로 활용됩니다. 뭐, 요즘 10대들은 또 프사를 비워놓는 게 트렌드라고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개인 정보, 사이버 정보 하면서 반복 학습을 한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배설하다시피 하는 이중플레어는 거의 없어졌으니까요.   


  그렇게 하하 호호 거리는 아이들이 바로 지금, 지천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벚꽃입니다. 목련입니다. 진달래이고, 제비꽃입니다. 샛노란 민들레입니다. 교실에도 복도 끝에도 화장실에도 운동장에도 화단에도 급식실에도 1교시에도 점심시간에도 봄이 넘쳐납니다. 고3 되고 나서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은 여학생 ㄱ, ㅇ, 남학생 ㅁ은 솔직히 얼굴을 못 알아보겠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그냥 물어봅니다. '너, 누구니? 우리 반이니?'하고. 그러면 아이들은 까르르 웃습니다. 그러면서 대답합니다. '저 누구예요. 쌤'. 수줍음이 많은 ㄱ은 급식실에서야 아는 체를 했습니다.


  어제의 졸사는 개인촬영이었습니다. 여권용 사진, 증명사진, 수능용 사진입니다. 혼자 촬영이지만 아이들은 하루를 그렇게 채우는 날이 좋은 겁니다. 다음 졸사는 5월에 있는 소그룹별 컨셉 촬영입니다. 심지어는 하루를 빼서 야외로 나갑니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 팀만의 컨셉을 만듭니다. 다양한 소품을 챙기고, 컨셉 옷들을 같이 입고 동작, 구호도 만듭니다. 5월의 졸사는 여름을 준비하는 팀플레이가 될 겁니다. 별로 설렐 일 없는 아이들이 4월 한 달 내내 설렘으로 가득해서 5월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까치의 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