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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08. 2023

멸칭

사진: Unsplash의Sander Sammy

기성세대, 젊은 세대는 앞뒤 순서일 뿐이다. 인생사 흐름이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였고, 젊은 세대가 더 젊은 이들한테는 기성세대일 수도 있다. 오래된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떠오른다. '너는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다'. 바로 그거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젊은 세대는 이것을 배우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어느 시대나, 사회에서나. 그런데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해 이러한 역할 수행 체계가 무너지고 구성원 간 상호 의존성이 약화되면 세대 갈등이 나타날 수 있다. 너희 도움 없이도 거뜬히 살아낼 수 있다는 거. 바로 이런 역할 수행 체계를 무너뜨리는 시작이 불특정 다수에 의해 조장되는 멸칭-경멸하여 부르는 말 - 문화의 확산이다.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아침에 먹다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을 때. 전쌤이 우리 반 A를 앞세워 사무실로 들어섰다.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A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올해 고3은 체육 시간 두 시간을 빼곤 모든 시간에 이동 수업을 한다. 그러는 일과 중에 수업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교과들이 여럿 있다. 그럴 때마다 해당 학생들은 사무실에 들어와서 휴대폰 보관함에서 가져갔다 반납한다. 그러기를 하루에도 여러 번. 분명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로 전근 오기 전부터 확고(?)하게 시행되던 규칙이다. 이런 상황에 A는 수업 시간에 휴대폰을 몰래 사용하다 걸린 거다. 그런데 문제는 전쌤이 훈계를 하는 과정에서 A가 <어쩌라구요>라고 내뱉어 버렸다는 데 있었다.


항상 그렇다. 사건의 본질보다는 잡다한 이바구가 더 큰 문제가 된다. 멸칭이 사용될 때가 그때다. 열중쉬어하고 머리를 먼저 들이미는 거다. 멀찍이 떨어져 말로 린치를 날리는 거다. 나는 너를, 너희를 경멸한다, 는 말로 기싸움을 시작하는 거다. 상대방이 '먼저' 겁을 먹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러는 거다. 휴대폰을 빼앗가 갔으면, 담임 앞에서 잔소리를 했으면 되었지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라나요라는 조금은 보드라운 의미가 20, X나 짜증 나게. 왜 휴대폰을 내는지 모르겠네. 십칠십칠 육두문자를 직접 활용하고 싶은 속마음이 80인 거다. 쎈(?) 이들이 사람 면전에서 쓰는 방식이다. 상대방의 화를 돋우는 거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provoking 신공이다. 이 신공에 낚이면 온팡 책임을 져야 하는 지경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얼른 전쌤에게 눈짓을 했다.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꼰대>, <라떼>라는 표현이 어정도 자리(?)를 잡은 지 한참이다. 꼰대, 라떼라고 일컫는 이들 스스로가 먼저 쓸 정도다. '이렇게 말하면 꼰대겠지만....' 하고. 이 표현들은 "나 때에는 말이야.."를 시작으로 본인들만의 과거 경험치를 바탕으로 자신보다 나이 어린 이들에게 강요하는 훈계를 거부하는 멸칭이다. 나는 너희들의 일방적인 강요, 훈계, 원하지 않은 조언은 듣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하지만 멸칭을 사용하는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세대 간의 훌륭한 경험 유산의 되물림이 '단절'될 수 있다는 것. 세대 간의 정서적 유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합평회에서 처음 만난 이들과 잠깐 이야기도 나눴지만, 세대 구분은 그저 필요조건일 뿐이지 싶다. 필요에 따라 결정권을 가진 이들 - 언론, 광고, 마케팅, 출판 등 - 이 던져 놓은 화두인 것이다. 대부분은 지나면서 스치듯 내가 무슨 세대인지 알게 되는 이유다. 나는 X세대였단다. 나 앞에는 7080, 그다음에는 Z세대.... MZ세대까지 왔단다. 앞으로 울트라 캡짱 세대가 다시 등장하겠지 싶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야만 하는 표현이니까. 그런데 이런 단순한 표현이 특정 세대를 경멸하는 의미로 변질되어 가지는 말아야 한다. 세대가 계속구분된다 하더라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세대 간의 올바른 경험치는 훌륭한 유산으로 이어져야 하니까. 시간이 더 흘러 지금의 MZ라고 불리는 이들의 강점이 또 어떤 세대에게는 훌륭한 유산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장애인의 반대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다. 그렇게 까지 해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이 멸칭으로 극복되지는 않는다. 대학 시절 창간된 지 얼마 안 되었던 한겨레 신문을 배달하면서 즐겨 읽었던 조선일보 칼럼이 있었다. 고 이규태 논설위원이 썼던 '이규태 한국학'.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주제가 '신래참학'. 새로운 신입이 들어오면 질서(?)를 잡는다고 조직의 쓴 맛(!)을 폭력적으로 보여주는 행태이다. 우리 대학 시절에도 있었던 신입생 - 1991년에는 새내기라고도 불리지 않았다 - 사발주 같은 문화다. 그때 그 시절 선배였던 이들이 잘못 배우고, 잘못 대물림했던 멸칭 문화다. 


[꼰대라떼] - '꼰대들의 라떼이야기' - 와 [아재리아] - 특정 기업 **리아를 빗댄 말이 아님. ~~ 나라를 뜻하는 접미사 ~ria에 착안해서 만든 조어임. 즉, '아재들만의 세상' - 의 의미 있는 경험치와 지혜마저 외면하는 것은 아깝다. 동시에 경험치와 몸 나이가 많으면 그리고 사적으로 친해지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하대>하려는 이들의 관계 지향점도 옳지 않다. 업무와 관련하여 가장 흔하게 듣던 - 요즘은 덜하다, 분명. 반복적인 교육의 힘이다 - 멸칭 중 하나가 <너 애자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 멸칭은 <너 고자냐>를 외쳐 되었던 선배들의 연장선에 있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는 한참을 <충>으로 벌레 취급하는 멸칭이 만연했었다. <급식충, 학식충, 설명충, 진지충, 틀딱충, 맘충....>. 정상과 비정상만 나누는 획일적,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옳지 않다. 


기성세대, 젊은 세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지나 간 길을 따라가고, 지나 온 길을 돌아보면 그 길은 언제나 그렇게 이어져 있다. 그 길 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이들 간의 선순환적 관계를 위해 서로의 강점을 강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은 세대와 입장을 넘어 언어폭력과 언어유희 사이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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