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Apr 25. 2023

봄꽃 달리기

사진: Unsplash의ilgmyzin

'졸사 찍는 날. 숏 촬영'. 


이제는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만. 요즘 아이들은 모든 걸 다 줄입니다. 키는 몸은 엄청 큰데, 말은 다 줄입니다. 우리도 그렇긴 그렇습니다. 우리도 많이 줄이면서 사는데..... 하며, 혼자 뜬금없어하고 있는데 어제 유용한 단축키라면서 여리(가명) 선생님이 메시지를 보냈네요. 올해 이곳으로 전근을 온 마흔 넘은 막내선생님입니다. 



오~ 이런 게 있었구나 했더니 옆에 앉은 벼리 선생님 - 우리 사무실 막내선생님입니다. 전자 기기 마니아입니다. 모든 전자기기의 얼리어답터. 아 며칠 전에도 신박한 32인치 모니터를 구입해서 한참을 설치하더군요 - 이 그럽니다. D도 있다고요. 윈도 키를 누른 채 D를 누르면 작업하면 화면이 순간 내려앉는다고. 바탕화면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방식이랍니다. 두 방법도 요즘 같은 시기에는 매우 유용합니다. 시험문제 출제기간이거든요. 


모르면 손발이 고생이지요. 하나씩, 하나씩, 하나씩 버튼을 눌러 내렸는데 말이죠. 다시 윈도 + D 버튼을 누르면 여러 개의 화면들이 다시 원위치되네요.  그런데 두 분의 정보 공유가 기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여리 선생님은 이런저런 이유로 서너 해 전 저와 대척점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사이입니다. 한 역할을 책임지고 있었던 나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나한테 반대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원칙에 반대하는 선봉장(?)이 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후배가 없던 분위기에서 다들 난감해 했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불합리한 부분을 그냥 참고 넘어가는 건 이제부터 서서히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칠팔 년을 같이 근무하다 올해 이곳으로 전근을 와서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마흔 초반의 벼리 선생님은 종합 병원입니다. 나처럼 허릿병이 난지는 스무 해 가까워집니다. 체중 때문에 무릎도 좋지 않은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흡연도 아직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주 버럭합니다. 늦은 결혼에 말없이 육아에 지쳐 자주 좁니다. 십여 년 전까지 나도 그랬지 싶습니다. 다들 목을 길게 빼고 모니터 속으로 빠져드는 일과 중에 요런 메시지를 보내기가 쉽지 않지요. 화장실에 갈 타임도 놓치면서 바쁘게 돌아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요.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건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이미 한 경우라야 가능합니다. 때로는 첨부할 관련 자료를 확보해 놓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요. 


점심때 텃밭에 가는 길에 여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요긴한 기능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별거 아니라고 쑥스러워하더군요. 그러면서 정말 요긴하게 쓰는 기능이 하나 더 있다면서 열일곱 같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복도에서 나만 보면 붙잡고 이야기 들어달라 합니다. 그래서 들어줍니다. 울분을 토로합니다. 그냥 끄덕이며 들어줍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자신의 해답을 가지고 다시 수업에 들어갑니다. 천성이 그런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알려달라고 했더니, 컴퓨터 앞에서 해야만 한다고. 그러더니 5교시 끝나고 냉큼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제 컴을 가지고 시연을 멋지게 해 주었습니다. 


한국지리 과목 특성상 이미지를 캡처해서 화면에 띄우고 지필 평가에 출제해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옮겨 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삽입해야 했습니다. 시간도 시간인데 노안이 일찍 찾아와서는 눈이 뻑뻑해지는 게 더 큰 일이었습니다. 아, 이러고 보니 내가 엄청 나이 들은 느낌입니다. 글재주가 없어 그렇습니다. 저도 아직은 오이 청춘입니다. 52.


이제는 좀 더 손쉽게 시험문제를 출제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원래 있던 기능일 텐데 선생 나이 스물네 살 만에 처음 알게 되는군요. 몰라서 양손이 참 많이 고생했네요. 윈도 키를 누른 채 shift + S를 하면 컴퓨터 화면이 검게 변합니다. 그러면 마우스로 캡처하고 싶은 부분만 드래그합니다. 그러고 나서 붙이고 싶은 곳을 클릭한 후 컨트롤 V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게 한글파일에만 붙는 게 아니네요. 카톡에서 바로 붙어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요 부분만 캡처해서 카톡에서 메시지로 보낼 수 있네요. 이 글을 다 쓰고 지금까지 깔아 놓고 쓰던 캡처 프로그램을 컴퓨터에서 다 찾아 지웠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봄을 알려주던 개나리, 벚꽃, 목련이 어느새 다 저버렸습니다. 어제는 퇴근하다 몇 주 전에 야근 끝나고 들어오면서 찍어 두었던 연분홍 벚꽃 기둥을 찾아보았습니다. 짙은 초록으로 변한 잎들 사이에서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아, 이게 벚나무였나 싶더군요. 그런데 그 아래에서 주변에서 동네에서 온 세상에서 다시 봄꽃들이 지천입니다. 알록달록한 진짜 봄을 느껴보라는 듯. 봄은 꽃들의 축제로 다 채워집니다.  


봄꽃은 당연히 남부지방에서부터 피어 올라옵니다. 동백이(서귀포, 광양, 서천 등에서 동백꽃 축제가 3월 초에 열립니다)부터죠. 그다음이 매화(광양의 매화축제), 산수유(구례, 이천, 양평 등의 산수유 축제), 개나리(목포, 응봉산 등의 개나리 축제), 목련(전국 유일의 천리포 목련 축제), 진달래(거제, 당진, 강화도 등의 진달래 축제),  벚꽃(진해, 경주, 여의도 등의 벚꽃 축제) 정도의 순서로 핍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릴레이를 합니다. 봄꽃들의 이어달리기.


지금은 또 오고 가는 길에 동백꽃, 개나리, 벚꽃, 목련 등에 밀려 셀쭉해졌었을 철쭉이 온 세상 가득입니다. 하얗고, 붉고, 분홍빛 등으로 반짝입니다. 봄꽃의 대미를 장식할 듯 온 동네를 다 덮여버릴 기세입니다. 물론 그러는 사이 질세라 연보랏빛 향기를 휘날리며 몽글몽글 덩어리로 피어납니다. 철쭉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이는 라일락입니다. 흐드러지게 피면서 봄눈까지 휘날리며 봐달라고, 봐달라고 소리쳤던 벚꽃 저리 가랍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날씨 변화에 따라 달라지지만 코로나 3년 이후 공식적으로 마스크를 벗은 올해가 유난히 그 순서를 잘 살펴보게 됩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습니다. 제 아무리 화려하고 난리법석이었던 봄꽃들도 열흘 이상 그 자태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생활에서도 그런 봄꽃 같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마음을 챙기는, 슬쩍 도움을 주는 여리, 벼리 같은 아름다운 후배님들이 있습니다. 자기 색깔이 강한 후배님들이 부럽습니다. 자판키는 줄이고 줄여 단축시키지만 그 메시지는 마음과 마음을 길게 길게 이어주는 마음 챙김입니다. 그렇게 한여름 정도를 막 지나고 있을 나에게 그들은 봄꽃입니다. 그렇게 계절을, 세대를 이어 달려주는 고맙게 예쁜 봄꽃입니다.


꽃이 진다는 건 다시 핀다는 약속입니다. 꼭 그 꽃이 꼭 그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내년봄에도 봄꽃들은 이어달리기를 할 겁니다. 그래서 나의 계절이 어디에 있건 그건 중요하지 않지요. 그저 그 봄꽃들을 즐기면서 아주 잘 지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오늘처럼. 

작가의 이전글 텃밭의 역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