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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pr 23. 2023

구멍뚫린 시험지

[나] 시리즈24...사진:freeimage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738에서 이어집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그다음 주. 수학 시간. 우리 반 수학 담당은 릴라였다. 나는 외모지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런데 남자인 그 릴라는 정말 못생겼었다. 얼굴은 젊어 보였다. 살짝 검었지만 피부가 반지르르했다. 그런데 그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대머리. 그리고 완전 제대로 금색테 안경. 한참을 들려 올라 간 커다란 콧구멍. 삐져 나온 코털이 가리키는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부어있는 것처럼 도드라졌다. 그래서 릴라였다. 몇몇 친구들이 함께 부르던 (고)릴라. 그리고 숨 쉬는 게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통이 두껍고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팔다리는 짧았다. 손가락이 아주 굵었는데, 짧았다. 그리고 항상 손가락 끝에는 끝이 봉긋하게 말린 짧은 드럼채를 들고 있었다. 


이건 내가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싶어, 선택적 기억으로 하는 모습이 아니다. 열심히 잘하던 친구들도 같이 그렇게 평가(?)했던 공통분모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아이들도 나를 그렇게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을지 모르겠다 싶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그렇게 선생님에게 지대한(?) 관심이 없다. 어릴 때부터 여러 선생님들을 겪은 노하우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현란한 영상 속에 등장하는 잘 생기고, 멋지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봐와 눈이 높아진 결과이다. 가끔가다 '쎔 좋아여~'하는 참 인간적이게 철없는 아이들이 있긴 하지만. 


릴라의 수학 시간은 공포였다. 우리 반에서 수학으로 난다 긴다 하는 한 둘 - 그중 한 명이 모대학 지리교육과 교수를 하는 친구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대학 지리교육과를 갔다. 그 덕에 고3 때 정말 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그때와 너무 꼭 같아 소름이 돋을 정도인, 변하지 않는 친구 중 한 명이다 - 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업 방식은 이랬다. 수학이 들은 날 달력 날짜에 해당하는 번호는 무조건 칠판 앞으로. 수학 교과서 예제 문항, 기본 문항을 순서대로 풀이해야 한다. 판서를 하면서. 그리고 직접 학급 친구들에게 묻는다. 맞았냐 틀렸냐. 딱 한마디를. 애들도 대답이 없으면 당신이 대답한다. 이렇게. 너 이 문제 첫 경험이니. 왜 그러니. 풀이가 틀렸다는 거다. 그러면 자기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의자를 책상밑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자기 의자가 있던 자리에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날짜별 번호를 부르는 방식이 일관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한 페이지에 풀어야 할 문제가 4개라고 치자. 그럼, 오늘 며칠이지로 시작한다. 3일. 그럼 3번 하신다. 그다음 13번 하신다. 그다음은? 13번 뒤에 하신다. 그 뒤에 옆에 하신다. 이러면 애들이 미치는 거다. 동공이 흔들리는 소리가 한가득이다. 어찌어찌 수업이 끝나고 살아남은 아이들 탄식이 더 한가득이다. 물론 게 중에는 - 앞글에서 말한 수학 천재 같은 그 친구는 - 즐기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친구들이 참 좋았다. 좀 잘한다고 체하지 않았다. 묻기만 하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도 아주 잘. 어깨뽕이 극에 달했던 중3 때 나처럼도 아니었다. 어깨뽕 자체가 없는, 참 착한 친구들이었다. 수학도 잘했던 그 친구처럼, 수학만 잘했던 한 친구 - 지금은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 는 심지어 수줍어하면서 잘 가르쳐 줬다. 


그렇게 토요일까지 대여섯 시간을 공포에 떨며 살았다. 마음이 쫄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학교 생활 중에 그날, 어둑하고 눅눅한 지하 같은 시간이 드디어 현실로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 수학 시간. 릴라가 시험이 한 장을 덜렁거리며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시험지에 구멍을 뚫어 드럼채 끝에 대롱대롱 매달고서. 흔들리는 그 시험지를 보는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가 딱 그 장면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오금이 저려왔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마음도 심란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나 보다. 인사를 받으시려다 말고 단호하게 외쳤다. 야. 너. 인사하는데 왜 고개를 숙여.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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