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May 14. 2023

6500만원짜리 와인

우리의 대부분은 소비자다. 소비자는 생산자 - 주로 기업 - 에 의해 대량 생산된 제품을 '알맞은' 대가를 지불하고 소비하는 주체이다. 그런 제품들은 소비자들의 거주지, 동선 근처에 아주 잘 배치되어 있다. 비치되어 있다. 현명한 소비자인 우리는 그곳을, 그것들을 잘 찾아낸다. 온오프라인 구분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매장 수를 가지고 있는 소매업태중 하나는 편의점이다. 온라인 쇼핑몰 - 무점포 소매업 - 보다도 많다. 최근에는 전국의 백화점 매출액을 넘어섰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상품을 소규모 매장에서 24시간 판매하는 장점이 작용한 결과다. 일반 마트, 슈퍼마켓보다는 다소 저렴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편의성, 접근성 때문인 결과다. 


편의점의 1인당 평균 구매액은 여러 소매업태중 가장 낮다. 하지만 대부분 도보로 이동하며 저가의 일상용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구매 빈도는 높다. 슬세권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박리다매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는 곳 중의 하나가 편의점이다. 물론 박리하지 않은 제품들도 가끔 있기는 하다. 어떤 매장에서는 와인을 판매하기도 한다. 시간에 쫒기는 학원가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게 펀스토랑이다. 편의점 다음으로 매출액이 많은 소매업태는 대형 마트 - 단, 동네 슈퍼마켓은 제외다 - 다. 여기에는 최근에 경쟁하듯 등장하고 있는 대기업표 복합 쇼핑몰이 포함된다. 대도시 소비자들의 휴일 소비 패턴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소매업태이다.  


대형 복합 쇼핑몰이 재래시장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문화 소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쇼핑과 문화 공간을 접목한 대형 놀이 공간이다. 문화를 누리는 삶은 여유에서 비롯된다. 경제적, 시간적, 심리적 여유. 학생 때는 국영수사과에 매달리지만 10대만 벗어나면 인생이 음미체가 되는 원리다. 때문에 '사람답게' 산다는 건 적절한 문화를 적절한 수준에서 소비하는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발견을 통해 바쁘지만 사랍답게 산다는 정서적 안정감과 만족감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증거가 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장소가 대도시 인근의 복합 쇼핑몰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다. 대도시 거주민들의 제대로 된 소비는 대부분 대형 복합 쇼핑몰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는 참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할 거리가 넘쳐 난다. 복합 쇼핑몰은 보통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조명과 인테리어를 겹겹이 반영하고 있다. 몇 층을 길게 늘여 놓은 구조이기 때문에 걷는 양도 만만하지 않다. 한두 시간 걸어 다니면 몇 천 보는 금방이다. 돈은 참 많은 것들을 가져다준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을,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사랑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연휴 마지막 날 늦은 오후에 운동삼아 들린 근처 대형 복합 쇼핑몰.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 들른 와인 매장. 그 안쪽에 보통 잠겨져 있는 고가의 와인들만 보관되어 있는 서늘한 와이너리가 열려 있었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보통 몇십만 원, 일 이백만 원 하는 이름 모를 와인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가장 저렴한 게 한 병에 6만 원. 그것도 내게는 부담스럽다.   


와이너리 내부에는 또 분리된 자그마한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고이 간직한 오래된 앨범들을 주르륵 진열해 놓은 것처럼. 눈높이에 와닿은 레드 와인의 가격은 천 칠백만 원이었다. 오~ 와~ 이런 거도 있구나. 말로만 듣던. 그래서 얼른 사진을 찍으려고 폰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천 칠백이라는 숫자 때문에 미쳐 눈길이 가 닿지 않은 아래쪽에 두 줄로 황금색 병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통 와인은 병 아래 가격표가 하나씩 붙어 있다. 그런데 그 황금색 와인은 병은 있었다. 아, 이런 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건가 하면서 눈을 돌리다 왼쪽에 커다랗게 써져 있는 설명서 속 금액이 눈에 와닿았다. 잉? 그런데 그 가격이.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봤다. 일십백천만....


6,500만 원이었다. 병당. 이런 건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 와인 가격을 보면서 남은 시간 아이쇼핑을 하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비가 있으니 공급이 있다, 는 표현은 어쩌면 틀린 말일지도 모른다고. 대도시 중심에 위치한 백화점 안 전문 주류 코너도 아니고, 주문 제작된 상품도 아닌 고가품이 대도시 인근 주변 지역에 한적하게 위치한 대형 복합 쇼핑몰에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보통 소득 수준에 따라 어떤 제품들을 주로 소비하는지가 달라진다. 나는 그냥 마시라고 해도 못 먹을게 분명하다.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 주는 하이볼 한잔이 훨씬 더 좋다. 정서적으로로 심미적으로도. 일반적으로 몸나이가 늘어날수록 경험하지 못한 건 잘 믿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자주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을 수 도 있다는 말이 된다. 집에 커다란 와이너리를 가지고 있는 친구덕에 가끔 일, 이만 원대 와인을 마실 기회가 있다. 기념일날 사만 원이 넘는 와인 한 병을 한모금 한모금 아껴 나눠마실 때의 행복감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6,500만 원짜리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그냥 주고 마시라고 해도 마시지 못한다. 와인잔 하나에 650만 원이 넘는, 한 모금에 65만 원이 넘는 포도주를 아까워서 목구멍으로 못 넘기지 싶다. 하지만 6,500만 원짜리 옆에 있는 6만 원짜리 와인은 껌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평소에는 삼사만 원대 와인도 구입하기를 꺼려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고가전략이 매우 정상적인 상황임은 분명하지만, 지혜로운 소비자들의 현명한 선택에 대한 충분한 연습이 오래 두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0대 때부터. 


몇 해 전 내 수업을 들었던 한 아이. 교복대신 그냥 그런 사복들을 입고, 그냥 그런 신발을 신고, 잘 모르는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주변 아이들을 통해 들었다. 후줄근한 점퍼가 삼백, 신고 있는 신발이 백 얼마, 손목시계가 백 얼마. 죄다 명품이란다. 자기 능력으로는 살 수가 없었을 테고, 부모님이 재력가인가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온라인 도박에 빠진 아이란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청소년 도박 중독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얼마 전 있었던 마약음료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다.


6,500만 원짜리 와인 코너에 열여덟 따님이 같이 있지 않아서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보통의 경우 몸나이가 어릴수록 우리는 저런 거 못 마시는 '수준'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 열패감의 일종이다. 못 마시는 거 맞다. 돈이 없어서. 그런데 없어서 못하는 게 모든 열패감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명품, 고가전략은 시장 전체의 질적 향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어떤 제품을 소비할 것인가는 구매력과 비례한다. 정말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의 구매력을 스스로 판단하고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가 현명한 소비자다. '알맞은' 가치에 자신의 구매력이 가능한 지출을 하는 연습은 경제 활동 인구에 속하는 15세 전후로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연습이 부족하면 매순간 한정된 돈 사용의 우선 순위에서 매우 혼란스러운(?) 경험을 몸나이에 관계없이 하게 된다. 항상 필요하다. 바꾸고 싶다. 새것에 매료되어 헌것의 가치를 잊어버린다. 손때가 묻은 물건에 대한 애착이 궁색한 변명이라고 치부한다. 항상 새로운 굿즈와 새로운 공간에서 영감을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스스로를 체면건다. 어차피 텅장일텐데 하면서 마음의 가불을 연속동작으로, 시리즈로 이어나간다. 그 행동에서 팍팍한 삶을 억지로 위로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비싸게 매겨야 잘 팔리는 한국 시장이 되어 온 지가 오래인지도 모르겠다. 


세뱃돈, 용돈부터. 그렇지 않으면 6500만 원짜리 와인을 128개월 유이자로라도 구입해야만 한다고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판은 살아가면서 와인뿐만 아니라 어떤 소비대상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슨 푸어, 무슨 푸어가 생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은 자주 노출되면 자신의 부족한 구매력을 열패감으로 판단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더 큰 구매 욕구를 가진 층에 편입되려고 하는 소비자층이 형성된다는 말과 연결된다. 소비는 돈의 절대값 보다는 사용의 우선 순서인데 말이다. 자신의 한정된 자원 사용에 대한 우선 순위를 스스로 매기고, 결정하는 합리적 소비 과정에 대한 자잘한 성공의 경험치가 앞으로 더 먹고 살기 어려워 질 다음 세대에게 더 크게 요구되는 이유이지 싶다. 


어제 부모님과 햇살 좋은 점심 시간에 맛있게 식사를 하면서 그랬다. 너희들도 어버이인데, 한번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먹고 싶은 거 먹으라고. 마음껏 먹으라고. 그래서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먹었다. 천상의 맛이었다. 몇천원도 자기 돈이면 - 원래 다 우리돈이지만 -  절대 내놓지 않는 따님이 편의점 들렸다가 내가 좋아한다고 사와서 출근가방에 넣어 둔 이천원이나 하는 레몬 사탕이 입속에서 녹는 내내 나는 달콤함이 6500만원 쯤 하는 와인 맛이지 싶다. 


작가의 이전글 애리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