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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May 16. 2023

난 나쁜 학생이었습니다

[나]시리즈27...사진:unsplash

(이 글은 https://brunch.co.kr/@jidam/752에서 이어집니다)


야자 때는 항상 수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해서 수학만으로 끝난 날도 많았다. 하지만 수학 공부를 위한 게 아니었다. 정석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수학 문제집을 뒤적거리기 위해서였다. 정석은 물론이고 수학 문제집의 해설 부분마다 종이를 찢어 페이지를 구분해 뒀다. 일단 해설이 길고 복잡하면 어려운 문제다,라는 전제였다. 그렇게 내가 풀어보고 풀어보는 척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딱 한 문제씩 골랐다. 그리고 그 문제의 풀이 과정을 본다. 만약 풀이 과정이 열 줄이라면 두서너 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문제다. 그러면 그 문제의 풀이 과정을 외운다. 영어 이디엄 쓰면서 외듯이이 몇 번이고 그렇게 쓰면서 풀이 과정을 외웠다. 


그런 날의 마지막 나만의 세리머니(?)는 다 외운 그 문제를 연습장에 고스란히 옮겨 적는 거였다. 내일 학교에서 릴라선생님을 찾아가기 위해. 그렇게 토요일까지 주 6일을 하루에 한 문제씩 질문을 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양치를 하고 있어도, 화장실에 가도 나는 릴라선생님을 교무실에서 그렇게 기다렸다. 아, 지금 내 주변에 그런 학생이 있다면 정말 소름이지 싶다. 그런 짓(!)을 2학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1학기 내내 했다. 내 기억 속에서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이 길을 걸은 지 25년. 그동안 함께 의미 있는 모임이나 연구를 한 동료들 중 가까이 지낸 분들 중에는 유독 수학선생님이 많다. 지금껏 연락을 하고 있는 나의 중학교 은사님 - 중3 나의 어깨뽕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던 그분 -, 업무적으로 힘들게 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준 A, 지금은 먼 길을 일찍 떠났지만 대학 때부터 내 옆에서 줄곧 정의로웠던 B, 처음 발령받아 왔을 때부터 작년에 이곳으로 전근 왔을 때까지도 마음을 챙겨주는 C - 대장암을 완치하고 알록달록한 총천연색 옷을 입고 다니면서 회식자리에도 한번 빠지지 않고 소주잔에 물을 마셔 대는 모습이 큰 어른 갔다 -, 무뚝뚝하면서도 너무 솔직해서 이런저런 뒷말을 들으면서도 속정이 깊은 마흔의 아름다운 후배 D, 아담한 체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장착한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여자사람친구 같은 E.


내 마음이 그들 마음에 오랫동안 가 닿는 것은 그들의 그릇이 나를 폭 안아주는 넉넉함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기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릴라선생님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6개월간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릴라선생님을 쫓아다녔다. 학교를 가는 유일한 이유였던 것 같다. 그 질문의 끝에는 얼굴이 벌게지고 혼란스러워하는 릴라선생님의 당황하는 모습을 엿보고 싶은 사악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던 거다. 열여덟의 나에게. 하지만 내 기억 속에 그 기간 동안 릴라선생님은 단 한 번도 나의 질문에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아니, 수업 밖에서 만난 릴라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선배로 보이는 사람한테 주눅 들면서 얼굴도 붉어지는. 내가 하는 질문에 얼굴이 붉어지는 당황과는 다른, 인간적인 수줍음이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다음 날 혹은 다다음날 찾아가면 멋들어지게 당신이 막혔던 문제를 풀이해 주었다. 오죽하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너는 어떤 놈이길래 수업은 나한테 듣고 질문은 딴 데 가서 하는 거야 라는 타박 아닌 타박을 자주 들었다. 물론 그것도 6개월이라는 기간에 비하면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수학적이지 않은 머리로 수학을 해대고 있었다. 그 힘 덕분이었을까. 수학은 여전히 나의 학교 생활을, 나를 힘들게 했지만 고3은 정말 즐거웠다. 그냥 마음이 편했다. 공부도 잘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산을 넘어가 학력고사를 보고 다시 교실에 다 모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수학 점수가 3등이었다. 지금 모대학 지리교육과 교수를 하는 절친이 사십몇 점. 그리고 다른 친구가 그다음. 그다음이 나였다. 91년도 수학이 말이 안 되게 어려웠어도 - 지금으로 표현하면 불수능이었다 - 말이 안 된다. 55점 만점에 28점.  


나는 그 덕에 이 길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다. 그 덕에 스물몇 해 동안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취업도 어려울 것 같다던, 시골 의사의 공포였던 조언을 들으면서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거다. 분명하다. 릴라선생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게 확실하다. 고3을 졸업하는 날 릴라선생님을 교문 언저리에서 우연하게 마주쳤다. 졸업을 축하한다며 후배들이 생계란 두 개를 내 손바닥에 강제로 올려 주고 만원을 삥 뜯어 간 바로 그때였다. 게다가 녀석들이 장난으로 축하 박수를 쳐준다면서 내 손바닥도 함께 쳐서 두 개가 퍽 하고 손바닥 위에서 깨진 바로 그때. 야. 너. 너 맞지. 하. 졸업이냐. 너 같은(?) 놈은 나중에 뭘 해도 잘 먹고 살 거야. 축하한다. 이 눔 아.


선생님, 건강은 어떠신가요.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진짜 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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