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un 08. 2023

뜨거운 장마가 시작되다

나는 오십 둘이다. 스물 하나 아드님과 열여덟 따님을 동갑내기 아내와 함께 키우고 있다. 아니 남매들이 우리 부부를 키우고 있다. 갑자기 나이를 말하는 이유는 부모님 호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아드님은 서너 살 때부터 지금껏 나를 아버지, 아버지 한다. 어릴 때는 대견하고 기특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거리감이 느껴진다. 안 그래도 물리적인 거리도 지구 반대편 가까이에 있는데 말이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아빠, 아빠하고. 


하기야 나도 그랬다. 지금도 그런다. 아버지는 아빠가 되질 않는다. 그래도 아버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코로나 기간 동안 우리 모친에 대한 호칭은 완전히 엄마라고 바꿨다. 일부러 그랬다. 애들 앞에서도. 아내 앞에서도. 처음 우리가 만났을 때 그 호칭처럼 그냥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도 엄마였다, 는 그 느낌을 다시 간직하고 싶었나. 큰아들의 미안함과 외로움이 뒤섞여 있지 싶다. 


결혼을 하면서 한 분 더 생긴 엄마는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지금껏. 장모님이라고 부른 적이 몇 번 없다. 결혼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친구의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나를 그렇게 아껴주고, 좋아해 주어서 그냥 그렇게 어머님, 어머님 한다. 장인어른은 아버님, 아버지 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불러서 나는, 우리 식구는 익숙하다. 


그 어머님이 건강 검진을 하신 후 삼주 정도의 이런저런 검사와 입원을 하셨다. 그리고 어제 결과일. 이제 막 먹고살기 시작한 처남이 오랜만에 식당을 남한테 맡기고 동행을 했다. 그런데 두 시간 넘게 기다리다 결과를 못 들었다고, 우리 부부가 걱정할까 미리 연락을 아내한테 했다. 조직 검사 말고 몇 가지 중요한 검사 결과가 아직 따라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고.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내원하라고. 공강 시간에 아내와 톡을 하면서 어머님의 안녕을 서로 바랬다. 그 안녕이 우리 모두의 안녕이라는 사실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곳에 따로 사시는 어머님은 엄마와 늘 같은 말을 자주 반복하신다. 부모가 아프지 않은 게 자식한테 줄 수 있는 가장 큰 부주라고. 부조를 그냥 그렇게 발음대로 말하신다. 서로 크게 도와주는 거라 늘 말씀하신다. 어젯밤 9시가 조금 넘어 잠들려고 하는데,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 오른 따님이 침대옆에 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눈빛 너머로 아내의 흐느끼는 통화음이 들렸다. 사촌 동생과의 통화였다. 어머님 최종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병원 가까이 사는 마음 급한 사촌 동생이 결과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누나. 이모님 암이야. 폐암. 전이 여부가 문제인데. 빨리 입원해서 이런저런 검사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침대 위에서 입에 힘을 꼭 주고 울음을 삼키면서 정신줄을 잡으려는 아내 손을 꼬옥 잡았다. 우리 둘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일팔 청춘 따님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아직 어머님 본인은 모르신다. 아신 들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언제나 신 덕분에 이만큼 살고 있다고, 자식들 덕분에 이만큼 살아왔다고 하실 거다. 다만, 자신의 몸보다 돈 걱정이 우선일 거다. 성 같은 아파트 재개발이 먼저일 거다. 먹고살고 키우느라 그러다 그 재개발을 기다리느라 가스불 앞에서 향공양 앞에서 보낸 세월이 몇십 년이라는 사실은 잊고 싶으실 거다. 문제는 마음 약한 아버님이다.  


유월이다. 이제 진짜 뜨거울 일만 남았다. 가족들끼리. 한 달 보름 정도뒤부터 시작할 장마가 우리 집에는 훨씬 일찍 오려나 보다. 나와 항상 함께 해주는 존재. 단 한번도 안아달라고 하지 않고 언제나 두 팔 벌려 안아주는 존재. 눈빛만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런 깊은 존재. 공기처럼, 바람처럼 해와 달처럼 언제나 내 곁에, 우리 곁에 있어준 그렇게 넓은 존재. 그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지금부터 뜨거움 사이에서 긴 장마를 잘 이겨내야지. 아내를 잘 지켜내야지. 운명적인 만남에서 시작된 우리의 그 길 끝 언저리에 내리는 장맛비도 반드시 그칠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맵단짠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