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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21. 2023

도로위에 악마가 산다

사진:unslash

오늘도 달립니다. 실제로 달립니다. 자동차로 출퇴근을 하고, 틈이 나면 달리기를 하고, 더 틈이 나면 자전거로 라이딩을 합니다. 하지만 라이딩을 할때, 달리기를 할때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 도로위에서는 나타납니다. 나에게. 가끔. 과속을 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차들은 왜 저래? 하면서 느릿느릿 구경합니다. 하지만 꼭 그 가운데에서 신기하리만큼 나를, 아니 내 차의 속도를 이겨 먹으려는 차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자신의 삶에 추월을 당한 것처럼 악착같은 차들이 있습니다. 


25년 무사고 운전입니다. 그런데 나같은 경우에는 어떨 때 과속을 하는지를 멈추고 나면 불쑥 생각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껏 진짜 마음이 급해서 비상등을 켜고 위험을 무릅쓰고 달린 기억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에 그냥 과속을 한 겁니다. 습관적으로. 이유는 간단합니다. 차를 타기 전 불안한, 불편한 내 마음을 안고 운전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내 부족한 심장의 능력치를 내 차가 발휘주기를 바라는 심보입니다. 내 차안에서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 안의 공간이라는 안도감에서 바닥을 드러내는 겁니다. 숨겨 둔 나가 되는 겁니다. 이럴때는 신체적인 변화도 동반됩니다. 호흡이 짧아집니다. 눈동자를 자주 움직이게 됩니다. 종아리 근육을 과도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평소에 자제하던 단어들을 유창하게 구사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연결된 온 몸의 신경망을 혹사시키게 됩니다. 그런 후 내리면 카페인이 당이 니코틴이 당기게 됩니다. 그 덕에 무엇을 보고 지나왔는지, 내가 어디쯤 지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차가 없는 도로를 가끔 달릴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내 속도가 얼마인지 인식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110킬로로 크루즈 기능을 켜놓고 달리는 데도 속도감이 없습니다. 당연하지 싶습니다. 속도감은 상대적인 거니까요. 속도감이란 얼마 이상이란 기준이 아닙니다. 나의 과거의, 평소의 속도감에 비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3차로에서 느릿느릿 달린다고 뒤에서 바짝 붙어 빵빵거리는 이유입니다. 


과속을 한다는 건 세상은 다 틀렸고, 나는 언제나 옳다는 잘못된, 똘똘한 어린이들도 요즘 하지 않는 짓을 어른이랍시고 먹고 사는 이가 하는 겁니다. 모지리똥꼬가 되는 겁니다. 잘 먹고 잘 차려입고 멋진 차 안에서 숨어서 말이지요. 내 심장이 아닌 엔진의 기계음에 나를 의탁하는 겁니다. 도로위에서 만나는 악마입니다. 내 안의 악마가 도로위에만 올라 오면 슬쩍 나를 부추기는 겁니다. 달리라고 달리라고 앞뒤 안가리고 더 달리라고.  


과속하지 말자고 다시 다짐을 합니다. 두발이건, 네발이건 백만번 성공을 했더라도 한방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내 마음이 과속되지 않도록 속도 조절을 잘 해야지 싶습니다. 도로에서의 과속처럼 마음의 과속도 아주 위험하잖아요. 마음이 오버페이스를 하면 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상처가 남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나의 인생은 지금도, 여전히 왕초보 연수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도로위에 나와 뒤섞이면서 나의 속도감을 찾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실제로 규정 속도보다 80킬로미터를 초과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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