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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19. 2023

출~동~의 힘

나 어릴 적. 산골에서는 놀거리가 넘쳐 났다. 언제나 흐르던 개울물, 아침저녁으로 늘 그 자리에 버티고 있던 뒷산, 권하네 집과 우리 집 사이, 동현이네 집과 우리 집 사이 골목.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때가 오히려 지금보다 어쩌면 시간이 더 부족했던 것 같다. 놀 시간, 만나서 놀 시간, 어떻게 놀지 궁리하는 시간, 논 다음에 다시 놀 계획을 세우는 시간이 언제나 부족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밥 먹어~란 소리를 초록색 대문 밖 골목에 나와서 외치지 않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냥 부엌에서 밥 하면서 외쳤다. 못 들으면 내 손해지하는 식으로. 어떨 때는 목덜미를 잡아끌고 집으로 들어가는 동현이의 뒷모습이 살짝 부러울 때도 있었다. 하기야 들렸어도 얼른 뛰어 들어간 날은 고기나 생선 굽는 냄새가 나질 않으면 여간해서 없었으니까. 


그런데 무엇보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모였을 때 편을 갈라 전쟁놀이를 할 때가 제일 힘이 나고 좋았었다. 왜 하필 전쟁놀이였을까를 전쟁놀이를 할 때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지역, 동네 구분 없이 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보고 배운 게 다 그런 거였던 거니까. 아니면 미리부터 사는 게 다 전쟁이라는 걸 몸으로 먼저 배웠나. 


언제나 지구를 잘 지켜주던 독수리 오 형제. 아마 아드님이 다녔던 고등학교 건너편 수타 짜장면집 오 형제들도 함께 즐겨 봤으리라. 언제나 이겨내는 마징가. 머리 위 조종석 유리가 깨졌을 때 불안과 슬픔이 고스란히 지금도 남아 있는 건 기억력이 좋아서는 아니겠지. 언제나 경쾌하게 공격을 준비하면서도 화내지 않고 걱정하지 않았던 메칸더, 메칸더, 메칸더 브이.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몸이 꿈틀거리면서 주먹이 쥐어진다, 지금도. 


공격하고 뛰어다니면서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전투적인 마음을 다잡아 준건 알프스 소녀 하이디였고, 엄마를 찾겠다고 쪼그만 게 삼만리나 떠난 주인공이었다. 아, 그 주인공의 이름은 생각이 안 난다. 그리고 일찍부터 조부 가정에서 자라면서도 아동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자기보다 큰 개와 함께 행복을 잃지 않았던 네로였다. 남자는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리면 안 되었기 때문에 울고 싶을 때는 보다 말고 다시 골목으로 뛰쳐나가게 만든 성가신 애들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노~올~자~아~ 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담 넘어 들어오면 언제나 바로 출동이었다. 엄마의 밥 먹어~하는 소리는 바람이 잡아먹지만, 친구들의 그 떼창은 그때 이미 5G였음이 분명하다. 그 출동의 마음에는 항상 이겨야 한다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이런저런 장비(?)들을 챙겨 나가면서 엄마한테 한번 더 그런다. 나! 이기고 올게. 꼭 돌아올게. 그렇게 매일 아침 나갔다, 매일 오후에 나갔다, 매일 저녁에 꼭 돌아왔다. 지금처럼. 그래서 지금이 되었다. 


출동은 출발과 다르다. 출발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다. 그렇게 해야 하는 약속된 움직임이다. 분명한 목표 지점이 있다. 가끔은 혼자일 수도 있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경우다. 밋밋한 일상이다. 정말 가기 싫으면 멈추는 거다. 하지만 출동은 갑작스러운 출발이다. 정해져 있지 않다. 무언가 일이 일어난 거다. 이벤트이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즐거운 거다. 가기 싫어도 함께라서 힘이 조금 더 나는 거다. 싫은 거 좋은 거 따지지 않고 가야만 하는 거다. 


지구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나라를 가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출발이 아니라 출동인 거다. 얘들아 출발~이 아니라 출동~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거다. 그래서 119가 긴급 출발이 아니라 출동인 거다. 두 음절. 출. 동. 그렇게만 외쳐도,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러면 어디선가 모르게 힘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출. 동. 을 외치고 나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무엇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한번 해보면 되지 싶었다. 그 힘으로 어김없이 나는 오늘도 출. 동.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때의 나처럼 오늘도 힘껏 출~동~ 하면서 외쳐 본다. 이유 없는 힘이 솟구치도록. 자, 오늘도 그냥 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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