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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18. 2023

버찌의 약속


단지 안 지하주차장 입구. 퇴근길에 항상 이 나무 앞을 지납니다. 그렇게 지나 다닌지가 지금 단지에서만 십년이 넘어 갑니다. 그전부터 이 나무는 그 자리에서 있었겠지요. 벚나무입니다. 왼쪽은 4월 봄에 새하얀 조명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입니다. 오른쪽은 5월 봄에 조명꺼진 벚나무입니다. 둘 다 저녁 8시 무렵에 찍었는데, 사진안에서도 한달새 낮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그렇게 벚꽃이 잊혀지는 데 채 한달이 걸리지 않았나 봅니다. 또 다른 꽃들에 취하느라 그리 되었다는 핑계를 대어 봅니다. 핑계로 성공하고 핑계때문에 실패한 모 가수처럼 그렇게 핑계로 대신합니다. 사실,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다면 어 이 나무가 뭐였지 싶어지겠어요.  


요즘 한참 타닥이와 산책을 하기 딱 좋은 저녁 시간들입니다. 야근을 하지 않을때라면 어김없이 산책을 하자 애씁니다. 하루 슬쩍 넘어가려면 퇴근한 내 다리에 기어오릅니다. 잉? 뭐? 왜? 안나갈라고요? 하면서. 산책이 끝나고 나면 허리를 굽히고 쪼그리고 하면서 샴푸를 해주는 건 따님입니다. 허릿병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언의 역할 분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렇게 샴푸를 하고 나온 타닥이 발바닥에 끈적함이 남아 있을때가 있습니다. 


말캉한 발바닥하고 끈적한 게 색깔까지 비슷해서 신경써서 씻겨야 하지요. 요즘 산책길 여기저기에 짙은 남색의 이것들이 떨어져 터져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에게 짓밟혀서도 떨어지다가도 터지기도 했겠지요. 타닥이는 그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요령껏 잘 피해다니면서 걷는데, 역부족입니다. 워낙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요. 


버찌입니다. 벚꽃이 피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벚나무 열매를 통칭하는 순우리말. 체리라고도 부르지만 끝까지 남색이고 자그마합니다. 지금 가로수, 산책로 바닥에 온통 버찌 천지입니다. 두어달 전 온 세상에 벚꽃만 있었던 것처럼 봄을 열어 준 벚꽃이 이제는 열매를 떨구면서 그 봄을 닫으려고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렇게. 묵묵히 꾸준하게 일관된 자기 역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건 잊었건 신경쓰지 않고 그렇게 평화롭게. 


기억이 추억이 되는 건 그 기억속에 의미와 재미가 충분히 뒤섞여 있을때 입니다. 화려함만이 그 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버찌 한알 한알이 만들어지고 떨어지는 그 시간동안 그 앞을 지나 친 나의 기억은 어떤 의미와 재미로 채워지고 있는지를 다 지켜봤을 겁니다. 그렇게 조용히, 묵묵히 다 챙겨봤을 겁니다. 내가 걷는 그 길을 지켜내면서.  


떨어진 버찌는 약속을 합니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겠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렇게 계속 떨어지겠다는, 세상의 변화를 온 몸으로 그렇게 받아 들이겠다는, 기억을 기억하겠다는 약속. 그러면서 나에게도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루 하루 채워지는 또 한해 동안 지금보다 좀 더 익어있으라는, 좀 더 평화로워지라는, 좀 더 어른스러워지라는, 좀 더 부모다워지라는, 의미보다는 재미에 좀 더 매달려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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