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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Jun 24. 2023

Dear.C.B

너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지가 벌써 3년이란 시간이 넘어간다. 다 각자의 목표와 의미를 위해 떨어져 산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답답할 때가 있어. 눈빛으로 목소리로 통하는 게 참 많은 우리 사이인데 말이다. 어제 한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면서 네가 더욱 진하게 보고 싶었다. 치대를 가려고 하는 아이인데, 요즘 슬럼프가 오래 오고 있나 보다. 그러면서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까웠단다.


그러고 보니 나도 부모, 자식, 남편, 직장인 그리고 그냥 원래의 나라는 다양한 역할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내 안에 스스로 갇히고 싶은 여러 개의 방들이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그러면서 그 아이에게는 또 너에게는 어떤 방들이 만들어지고 사라질까 하고 생각이 들더구나.


기술의 방. 이 방은 먹고사는데 필요한 온갖 현실적인 기술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주로 자기 업무적 능력을 만천하게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도구들이 있지. 그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갈고닦는 연습의 방이란다. 이 방에서 계속 실험하고 실패하고 도전하는 기록들이 켜켜이 쌓여갈 때 겉에 걸친 유니폼이 훨씬 더 폼나게 반짝이게 되는. 이 방에 불이 오래오래 켜져 있을수록 먹고사는 문제는 조금 수월하게 해결될 수 있을 가능성이 커진단다.  

 

휴식의 방. 다 아는 것처럼 공부건 일이건 휴식이건 다 에너지가 필요하지. 하지만 그 에너지가 어느 순간 생기는 건 불가능하잖니.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적절하게 만들고 모아놓는 습관을 기르는 게 아주 중요하지. 그래서 몸나이에 관계없이 좋은 습관 들이기 - 잘 먹고 잘 자고 운동하기 - 만큼 중요한 휴식은 또 없지. 더 살아보면 알 거다. 다른 방들의 에너지를 이 방에 다 몰아넣어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아니, 이 방만이라도 제대로 넓히고 꾸며 놓으면 그럭저럭 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체력이 체격을 키우고 마음을 키우는 건 네가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 거지만.  


치유의 방.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준비. 그리고 알리기 시작한 후 찾아오는 또 다른 준비. 그러는 모든 과정이 인간관계란다. 몸과 마음을 써서 표현을 하고 타이밍을 잘 잡아 표현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단다. 어릴수록 그 연습을 가족을 통해서 잘 해내야 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이 방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치유를 할 수 있도록 잘 꾸며놓을 필요가 있어. 물론 치유하는 방식이 개인적으로 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단 하나. 이 방에서 머물다가 세상 속으로 나오면 들어가기 전보다는 분명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리프레시되어야 한다는 거지.


비밀의 방. 이 방에는 사실 어린 내가 여전히 들어 있단다. 나의 몸나이가 몇 살이 되건 말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물론 즐겁고 행복한 나도 있으니까. 똥만 잘 싸도 밥 한 숟가락만 더 먹어도 칭찬받으면서 살던 나도 있고, 친구들과 아무런 걱정 없이 골목골목을 누비던 나도 있지. 포기하고 싶던 과제를 멋지게 이겨냈던 그 뿌듯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나도 있고. 물론 그 반대의 나도 함께 있지. 표현 못하고 공포스러웠고 어쩔 줄 몰라했던 어린 나. 실패가 두려워 미리 포기하는 연습에 매우 익숙해 있던 나. 지금도 수많은 어른들이 이 방에 있는 어린 자신에게 나만의 비밀이란 딱지를 붙이고 세상밖으로 당당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많지. 하지만 꼭 어린 나가 지금의 나를 훼방만 놓은 건 아니란다. 초점은 어린 나한테 지금의 나가 여전히 통제를 받고 조정을 당하는 상황을 이 방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지. 그러려면 치유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잘 찾아두는 게 아주 중요하단다.


도피의 방.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들락날락 거리는 방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물론 그 위치가 내 안의 여러 방 가운데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 깊숙이 위치하는지, 문 열자마자 얼른 뛰어들어갈 수 있는 대궐 같은 방인가가 다 다를 뿐. 하지만 이 방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문이 사라지는 신기한 방이란다. 다시 돌아 나오려면 모든 벽을 직접 더듬으면서 한참을 찾아야 한단다. 그만큼 다른 방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는 방이지. 창문이 없으니 당연히 세상밖 햇빛도 바람도 느낄 수 없어. 일단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래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지. 가끔은 이 방에 들어앉아 있는 시간 동안 다른 방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는 게 더 힘이 들 때가 있어. 물론 아주 짙은 도피처가 될 때는 아예 이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 경우도 있지. 이 방에 오래 머물면 합리적인 핑계만을 찾아 혈안이 되는 인간이 되기가 쉬워. 해보지도 않고 그럴싸한 이유로 자신의 실패를, 아니 실퍠의 예상을 합리화하는데 돈과 몸과 마음을 쓰는 그런 사람.


마지막으로 텅 빈 방. 이 방을 무엇으로 채울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나의 멀티롤에 대한 경험치를 쌓다 보면 이 방은 어떤 용도로 만들까 싶어질 때가 온다. 그러다 나는 치유의 방이나 휴식의 방을 하나 더 늘리겠다고 결정하기도 하지. 물론 반대의 경우로 도피나 또 다른 비밀의 방을 만들어 버리기도 하고. 소소하게 작지만 성공을 해봤다는 그 경험치들은 당장 나의 삶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지나고 보면 그 순간의 awesome! 정도의 감탄사.


그런데 그런 소소한 성공이 지금의 나를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인생의 진리다. 살아가다 보면 몸나이에 관계없이 눈빛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단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삶이 긍정적으로 달라질 가능성은 훨씬 더 커지지. 그 사람들의 공통점이 감탄사를 잘 쓰는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아빠는 이 방을 감탄사의 방이라고 부른단다. 크고 작은 나만의 감탄사를 모아 놓은 유니크한 나만의 방.  


지금껏 이야기 한 이 방들은 죄다 문으로 미로처럼 연결이 되어 있어. 방의 크기도 위치도 지금의 나마다 다 다르지. 하지만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보통 한 두 개의 방만 가지고 있는 거야. 돈을 주고 사는 방은 최대한 넓게 넓게 만들려고 아등바등거리면서. 그런 방조차 나의 힘으로 구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가족은 - 부모와 자식은, 부부는, 형제는 - 바로 서로가 그 방들의 손잡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란다. 다만, 방문을 여는 열쇠를 각자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족만이 특정한 방에서 비용과 시간을 몰아 쓰게 되면 다른 가족이 누려야 할 그것은 줄어들 수밖에 없단다. 그래서 가족이다.  


3년 전 너와 함께 2주간의 자가격리를 했던 메이플리지의 한 목조 주택 1층. 하염없이 잠에만 빠져 있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다시 돌아오기 쉽지는 않겠지 싶다. 그 잠 속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고민을 했을까 싶다. 그곳에서 시작된 너와 나의 시간 동안 너와 나 안에는 어떤 방들이 어떻게 꾸며졌는지 되짚어 볼 시간이 되었지 싶다. 이제 몇 달 뒤면 돈과 몸과 마음을 함께 쓰면서 네가 새롭게 도전하려는 그 길이 시작되려나 보다.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단다. 하물며 옆에서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이들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리기가 쉽지 만은 않단다. 그들에게 더 잘해야 하는 이유다.


지금 수련회를 떠나고 있는 중이라고 했지? 월요일이 졸업식이고? 참, 그간 고생이 많았다. 낯설고 말설은 곳에서 한 두 살 어린 다국적 아이들과 고등학교 과정을 잘 끝내느라 얼마나 마음 쓰고 몸 썼을지 짐작이 잘 되지 않는구나. 정말 애 많이 썼어. 월요일 졸업 미리 축하한다. 사람들과 모여 행복한 시간 보내. 그곳에서 더 넓고 더 많은 내 안의 방들을 잘 정리하고 다듬어 보는 고마운 시간들이 되길. 그런 경험 속에서 다시 너에게 넓고 다양한 방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두 손 모아 응원해.


더 자주 전화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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