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Tea Jul 03. 2023

엿 같은 인생

사진...mbiz.heraldcorp

어릴 적 흔하게 먹었던 옥수수엿, 국내 여행 다니면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호박엿, 땅콩엿, 가평장에서 먹었던 잣엿, 인사동에서 처음 먹어봤던 실타래엿 등 엿은 종류도 많다. 엿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주점 부리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달달한 간식이었다. 먹다 지치면(?) 몰빵 게임도 엿으로 했다. 기다란 엿을 반으로 잘라 구멍이 몇 개인지 세어보고 가장 많은 사람한테 잘린 엿을 몰아주는 엿치기도 자주 했었다.


그런데 그 기다란 엿은 대량 생산으로 나온 것이고, 기억 속 어릴 적 엿은 리어카 큰 엿판에서 유쾌한 아저씨가 콧노래를 부르면서 도끼날처럼 생긴 큰 엿칼로 리드미컬하게 끊어 팔던 덩어리 엿이 제 맛이었다. 내가 검정고무신 세대는 아니어서 빈병이나 고물을 엿으로 바꿔먹지는 않았다. 돈 주고 사먹었다. 오백원짜리 지폐로. 하지만 언제나 봐도 아저씨 마음대로 끊어주는 것 같아 언제나 아쉬웠던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여하튼 강력한 당 충전 주점부리였던 엿은 만드는 과정이 결코 녹녹하지 않다. 

  

① 쌀을 담근다

② 쌀을 잘 불린 뒤 엿밥을 찐다.

③ 엿밥과 엿기름 그리고 따뜻한 물을 잘 섞어 13시간 정도 삭힌다

④ 앞과정에 삭힌 내용물의 물을 짜낸다

⑤ 앞과정의 물을 불에 조청이 될 때까지 2~3 시간 졸인다.

⑥ 조청이 완성된 후 일정시간 식힌 후 완전히 굳기 전에 밀가루를 묻혀 늘린다.

⑦ 늘린 후 먹기 알맞은 크기로 자르면 완성된 엿이 된다. - 출처:경주양동마을(https://bityl.co/JTPP)


전통적인 먹거리가 다 그렇듯이 만드는 과정이 전형적인 슬로푸드다. 식구들을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만 가지고 온갖 정성을 들여야 만날 수 있는 엿이었지 싶다. 엿의 주원료는 소중한 곡식이었던 걸 보면. 결코 가볍게 만들어 먹을 수 없던 먹거리. 엄마가 엿기름 가져와 해서 찬장에서 한참을 찾아 헤매인 엿기름은 기름이 아니다. 밀, 보리 등에 물을 주어 싹을 틔운 후 말린 것으로 당 분해효소이다. 맥아라고도 한다. 이렇게 정성껏 만든 엿이 왜 우리 문화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이 생겼을까.



ssul1_‘엿 먹어라’에 욕의 의미가 담긴 것은 1964년 서울 중학교 입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처럼 돼 있다. 당시 자연과목 18번 문제가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을 고르라’였고 디아스타제, 꿀, 녹말, 무즙이 보기로 제시됐다. 출제 측이 요구한 정답은 디아스타제였다. 그런데 무즙에도 디아스타제가 들어있음을 확인한 불합격생의 부모들이 실제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와 시교육청에 찾아가 던지며 “엿 먹어보라”라고 항의했다. 결국 무즙도 정답 처리됐고 소송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구제됐다.


ssul2_그런데 사실 훨씬 전부터 이 말이 있었다. 상대가 가당치 않은 말을 하면 “듣기 싫으니 엿이나 먹어라”는 식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54년 8월 22자 ‘古風ㆍ 今俗’ 칼럼에 따르면 이 말은 조선시대 군역제도와 연관이 있다. 당시 강원도 일부 지역의 군역 대상자들이 서울로 차출돼 왕십리 쪽에 집단거주지를 형성했고. 일부는 군역이 끝나도 귀향하지 않았다. 그들이 살던 초막이 집처럼 매매가 되기도 했는데, 누군가 초막을 사면 반드시 엿을 주변에 돌린 데서 이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당시엔 글 모르는 백성이 많아 초막을 매매하면서도 계약서 같은 것을 작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동네아이들을 불러 엿을 돌리며 ‘얼마에 이 집을 샀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일종의 대중공증을 받았다. 이후 소유권 분쟁이 생기면 동네사람들이‘내가 몇 살 때 엿을 먹었다’고 증언, 특정인의 소유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엉뚱한 주장에 대해 퇴박 주는 의미가 된 것이다. 재미있는 유래담들이지만 어쨌거나 방송에서까지 대놓고 할 말은 아니다.

- 출처 : josus62@hk.co.kr(https://bityl.co/JTPd)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시험을 볼 때 꼭 합격하라고 응원하면서 주는 것이 또 엿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봤던 엿 먹어라의 의미는 아닐 거다. 그럼, 왜? 그런데 갑자기 드는 궁금증. 엿은 왜 엿일까? 엿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음이 한자는 아닌 것 같다.




녹말을 함유한 곡식이나 감자 등을 엿기름 등으로 삭힌 뒤, 그것을 짜낸 물을 달여서 만든, 액체나 고체 상태의 달고 찐득찐득한 식품. 세는 단위는 가락·개·타래·목판. 이당(飴餹). - 구글 한국어사전(옥스포드 사전)



곡식으로 밥을 지어 엿기름으로 삭힌 뒤 겻불로 밥이 물처럼 되도록 끓이고, 그것을 자루에 넣어 짜낸 다음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고아 만든 달고 끈적끈적한 음식.≒이당.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순우리말 엿을 한자로는 이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飴(이) 당. 당은 달다는 의미니까 이를 좀 자세히 살펴보자. 먹을 식(食) 변에 기쁠 태(台) 자로 구성되어 있는 상형문자다. 엿을 먹으면 기쁘다. 그렇지, 달달한 걸 먹으니까 기분이 좋아진다. 달달한 먹거리가 없던 시절에 엿은 크나큰 기쁨을 주는 귀한 음식이었던 거다. 거기서 출발해서 엿이 기쁨을 부르는 음식으로 승화되었던 거다. 긴장된 시험을 본 후 큰 기쁨을 얻어라. 그게 엿이었던 거다. 


엿은 가만히 두면 스스로 부러지지는 않는다. 대신 말랑해진다. 조건만 맞으면 죽죽 늘어난다. 잘 휘어진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잘 맞춰 반응한다. 주변에서 가해지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그리고 누구나 좋아한다. 이가 약하면 녹여서 먹으면 된다. 엿같은, 하고 엿에다 내 악감정을 몰아주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안도현 시인의 표현을 조금만 빌린다면 우리가 언제 누구한테 엿처럼 그렇게 달콤함을 가득 선사한 적이 있던가. 엿조차도 가지고 있는 그런 유연함을 발휘하면서 잘 살아내었던가. 가만히 놔둬도 스스로 부러지지 못해 안달이지 않았던가.


어제 엄마, 아버지가 그러신다. 당신네 하고는 또 다르게 우리 세대는 남의 인생을 평균 25년 이상 더 살아야 하는 세대라고. 남의 인생. 원래, 내 인생이 아닌데 주변 환경 - 잘 먹고, 많이 배우고, 의식이 높아졌는데 의학까지 발달해서 과거에 살다 간 사람들에 비해 덤으로 더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그렇게 표현하신다. 단, 유병 장수의 시간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전제를 다시면서 - 덕에 더 오래 살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이 진짜 나의 인생이라는 게 역설적이긴 하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달달하게 유연한 태도를 배우려는 시작은 의미 있지 싶다. 그런 시작만으로도 지금보다 좀 더 달달하게 기쁘게 살아내지 않을까. 나도 나를 아는 이들과도. 맞다. 이미 오래된 미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더 엿같은 인생을 살아야 겠다. 늘 그렇듯이 그 시작은 먼저 눈인사 건네기, 목례하기, 집에서 들고 날 때 가족한테 인사하기부터, 한참 잘 들어주기. 

작가의 이전글 너도 어제 늦게 들어왔구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