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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UX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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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 Sep 11. 2016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디자인하세요-

그저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디자인을 하고 계시나요?

Summary.

디자인(기획)을 할 때 '이 디자인은 어떤 성과를 가지고 올 수 있나?’와 ‘이 디자인의 성과는 측정 가능한가?'를 자문하면서 해보시길 추천합니다.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 상당히 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를 해외시장으로 확장하려는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인데요, 조그마한 회사의 특성상 어쩌다 보니 제가 프로젝트의 매우 큰 비중을(시장 조사 + 서비스 기획 + 웹사이트 설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프로젝트 소식을 접했을 때는 많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고객 리서치를 하고 또 서비스를 운영하고 개선하면서 쌓아왔던 노하우와 아이디어들을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대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기대가 많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신나는 마음으로 웹사이트 기획/설계를 하고 드디어 이사님에게 피드백을 받는 날이 되었는데요, 제 화면 설계도를 보고 이사님이 저에게 처음으로 했던 질문은:

네가 하려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너 이 많은 디자인(기획) 요소들 중에 사용자들이 정말 필요한 기능은 뭔지 어떻게 증명할 거야?


'읭? 반응이 왜 이렇게 시원치 않지...?'라는 생각이 속으로 들긴 했지만 나름 이빨 까기(라 쓰고 '논리력'이라 읽습니다)로는 자신이 있었던 저는 열심히 제가 설계한 웹사이트 설계로의 요소를 하나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각 페이지에서의 시선의 흐름과, 유저의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flow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을 하고 있을 때 참다 지쳤다는 표정으로 이사님은 제 말을 자르고 다시 한번 질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설계한 이 화면들이 유저들에게 맞는지 안 맞는지는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이사님에게 받은 후에야 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그제야 이사님은 천천히 자신의 피드백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설계한 이 모든 화면들의 요소들과 스토리텔링은 설명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지금 우리 웹사이트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경험들을 모두 담아낸 것 같은 너무 완성도가 높은 화면의 설계인 것 같고, 과감한 결정이 있는 부분들도 있지만 재미있고 흥미로운 시도들인 것 같아. 하지만 이 웹사이트의 목적은 무엇이지? 유저들이 ‘구매’를 하는 거잖아? 너는 유저의 입장에서 ‘재미있는’ 경험들은 많이 만들었지만, 나는 과연 저 기능들 중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구매’까지 이어지는 기능은 몇 개나 될지 사실 모르겠어. 네가 지금 설계한 모든 기능들을 다 버리고 딱 구매만 할 수 있는 페이지만 만들었을 때 우리가 물건을 더 팔 수 있다면 난 고민하지 않고 그 한 페이지짜리 디자인을 네가 설계한 10페이지짜리 설계도보다 먼저 개발할 거야"


처음 그렇게 이사님한테 피드백을 받고 나서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고민하고 만들어낸 모든 기능들이 구매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저는 증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제 말에 설득력이 생기도록 열심히 화면들을 검토/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나절 동안 이리저리 고치고 난 뒤 제 앞에 남아있는 화면 설계도는 상품 상세화면 한 페이지였습니다.


다른 경험들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이 ‘허무한’ 화면 설계도를 보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가 설계했던 모든 기능들이 한 페이지에 녹아들어 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설계한 대부분의 기능들은 이 웹사이트의 가장 큰 목적인 ‘구매’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혹은 증명하기 매우 힘들다)는 이유로 떨어져 나갔죠. 사실 UX 디자이너로서 버리고 싶은 기능은 없었습니다. 정량적이지는 않지만 정성적으로라도 브랜딩 차원에서 도움이 될만한 기능들이라고 생각을 했고, 지금도 제가 설계했던 기능들의 그 잠재적 영향력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의 잔 가지 같은 경험들은 그 나무의 뿌리와 기둥이 되는 핵심적인 '구매'경험이 증명되고 검증되지 않는 이상 지금 단계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큰 경험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경험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며, 그 경험은 꼭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기능들을 추려나가면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은, 많은 기능들을 추려보고 가장 핵심이 되는 ‘구매’ flow의 경험에 집중했을 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유저 시나리오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 핵심 경험에 맞는 정말 부각되어야 하는 기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로그인을 한 유저의 경우 상품 페이지 하나에서도 적어도 3단계 정도의 interaction을 통해서만 이 페이지의 모든 컨텐츠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한 페이지라고 생각한 화면이 알고 보니 3가지 다른 정보량을 가지고 있는 3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던 것이었지요. 또한, 로그인을 하지 않고 상품 페이지에 접근한 유저의 경우에는 제공하는 메시지가 달라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그인을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페이지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죠. 로그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 상품 페이지의 목표는 ‘로그인’이 되어야 하고, 로그인을 한 유저라면 ‘구매하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로그아웃을 한 유저의 시나리오까지 포함을 했을 때 결론적으로 이 한 페이지에서 증명을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기능/flow들이 약 5개의 단계까지 나눠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페이지에서 증명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단계들이 5개나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설계하는 화면들은 매 페이지마다 이 정도 수준의 깊은 고민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 내기를 이사님이 애초에 원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페이지짜리 가벼워진 화면 설계도를 다음날 이사님에게 가져가서 각 기능들에 대한 증명을 어떻게 할지 설명을 하려던 순간, 제 화면 설계도를 한번 가볍게 주욱 훑어본 이사님은 제 말을 또 자르고 바로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네가 디자인한 이대로 개발해 보자


내 디자인을 증명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화면 설계안 공유 > 피드백 > 수정 > 최종 피드백까지 시간적으로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은 에피소드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전 직장에서 저를 감히 자평을 하자면 적어도 논리력으로는 유관부서를 통틀어서도 크게 뒤처지지는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경험적으로 유저에게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는 것뿐만이 아닌 ‘증명’까지 할 수 있는 디자인이 가장 강력하고 완성된 수준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디자인(기획)이라는 것을 증명을 해야 한다는 대상보다는 설명하고 설득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저도 모르게 치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반성을 하기도 했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디자인하세요

모든 디자인을 수치화하고 증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핵심적인 flow/기능/경험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수치적으로도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핵심적인 단계들의 목표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유저들이 그 기능/flow를 디자인한 나의 의도대로 실제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flow를 포기하고 이탈을 하거나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지 수치적으로 증명을 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정말 핵심적인 기능과 flow라면, UX 디자이너의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설계를 하며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기보다는 '가설'을 세우는 것이 시작입니다. '이런 이런 이유로 이 기능이 필요하다/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설명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런 이유로 이 기능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이러이러한 효과를 기대한다'라고 증명하고 싶은 가치까지를 포함한 가설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물론 증명을 할 수 있는 기준들은 그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목적에 따라 다양해집니다. PV(방문수), UV(순 방문자수), 회원가입 수, 로그인 전환율, 체류시간, 다음 페이지 이동률, 구매 버튼 클릭 전환율, 페이지 공유 수, 구매 성공률 등등 측정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 저 증명을 하고 싶은 목표 기준 중 제일 중요한 한 가지 목표를 집중하면서 화면을 설계를 하게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싶었던 너무 많은 아이디어들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제가 예전에 쓴 ‘한국 대기업에서 UX가 망하는 이유’ 글에서 ‘대기업에서 UX를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 이야기는 대기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대기업이든 스타트업이든 중견기업이든 내 디자인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없거나 방법이 없다면 그만큼 내가 디자인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획을 하고 디자인을 할 때 ‘이 기능/경험을 증명할 수 있는가?’‘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항상 하면서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매일 야근하면서 결국 성과는 남 좋으라고 그렇게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만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 디자인은 실패해도 성공해도 책임을 당당하게 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디자이너가 좀 더 멋지고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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