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세상에 나가기 전 마지막 해에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웃던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너는 늘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다. 너와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에 있어서 우리는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놓지 못하는 것이 늘 닮아 있었다. '사랑'해서 나를 잊지 못한다는 너의 말과 '너'는 평생 봐야만 할 것 같아서 너를 놓지 못하는 나, 그리고 헤어짐의 의미를 아는 우리는 이별 없이 인생을 함께 하자고, 이 손을 놓지 말자고 약속했다.
너는 늘 말했다. 나는 너의 전부라고. 그런데 사실 나에게는 스무 살에 정했던 내가 가는 길이 나의 전부였다. 그 길을 가는 것에 있어 우리의 관계 때문에 내 모습이 망가지는 것이 싫어서 나는 너와 헤어지기도 했었지만,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내가 가는 이 길을 네가 함께 가겠다'는 그 말과 약속에 너를 믿었다. 나를 망가뜨리게 하지 않고 나의 모습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세월이 흘러도 첫 만남, 그때의 모습을 서로가 늘 기억해 주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특별했다.
우리는 특별한 결혼식을 했다. 때가 일렀는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의 축복도 양보해야 했지만, 우리는 오로지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그 타이밍에 경건하게 서약을 맺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가정을 굳건하게 세우자고 내가 가던 길에 조금 힘을 빼더라도 함께 가기 위해 열심히 터를 닦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내실이 다져졌다고 믿었던 해에, 이렇게 함께 전진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그 해에 아기가 찾아왔다. 우리 둘 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어쩔 줄 몰랐으리라. 나는 막막한 상황에서 아기도 함께 갈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 지금까지 닦아온 것을 포기하지 않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너는 나의 방법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의 방법을 함께 찾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온 것도 다 없애버리고 새로운 판을 짰다. 이 가정을 책임지겠다며 내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잠시만 기다리라는 너의 말에 나는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배 속에 아기가 생겼고, 나는 아기가 처음인데, 나의 모든 쌓아온 것들이 너의 방법대로라면 다 날아갈 버릴지 모르는 도박과 같은 미래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얘기했다. 십 년째 너를 알던 나였지만, 더 이상 너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불성설이었다.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이유로 밖으로 나가야 했기에 정작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임산부인 나를 책임지지 않았다. 나는 너를 잃었다. 우리의 사랑은 종적을 감추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너의 독단적인 결단은 나에게 배신감으로 다가왔고, 늘 온유했던 너는 무슨 불안이 찾아왔는지 날 선 발악으로 나를 몰았다.
십 년간 쌓아오던 신뢰가 와장창 깨졌다.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입밖으로는 말하지 않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끝끝내 혼자서 결정하며 나아가는 네 모습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그럴만한 이유'를 찾아 '너'를 이해하려 하던 미련한 나의 모습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황에 따라 변해버리는 사람들이 융통성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정을 세우고, 함께 가는 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들 우리의 배가 향하는 방향을 바꾸는 것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판을 새로 바꿔버리는 너의 방법에는 앞으로도 불안해서 함께할 수 없었다.
평생 봐야만 할 것 같아 너를 놓지 못하던 나였는데, 나도 변해버린 것일까? 너를 바라보는 것이 이젠 내겐 너무 큰 아픔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처음으로 너를 놓았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 할 수 없었다. 서로를 위해 관계의 매듭을 짓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게는 우리의 관계를 끝내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우리가 평생 함께하겠다고 단순한 약속이 아닌 맹세를 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로는 아기였다. 결혼식 날, 나는 너에게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했다. 힘들 때나 지칠 때나 너를 떠나지 않고 이 가정을 지키고 너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둘째, 너는 더 이상 내 남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기의 아빠였기에, 나는 너에게 끝끝내 끝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단순히 '나'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너의 아내이자, 아기의 엄마가 되어 있었기에. 내 가족의 일원으로서 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 가정을 위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우선 고민을 해봐야 했다. 한 사람의 아내로서 나는 무엇에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인지, 아기의 엄마로서 나는 마지막으로 어디에 힘을 쏟아야 할지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내겐 아직 다하지 않은 책임들이 많이 남아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슬프게도 내가 가던 길은 멈춘 채 '나'는 없어져 버렸지만, 아직 내가 속한 이 가정은 살아있었기에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나의 자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자리를 지켜보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마지막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오늘 다할 수 있는 사랑으로 우리 가정을 위해서 뛰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나는 내 본분을 지키고 싶었다. 이것만으로도 샘솟는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은 상상하지 못한 채 작고 소중한 내 아기를 위해서도 오늘의 거리를 완주해야만 했다.
얼굴엔 웃음빛을 잃었고, 출산 후 몸은 망가져 버렸고, 울렁이는 감정은 나를 삼킬 듯 내 앞에서 도사리고 있었지만, 나는 매일 아침 허리를 동여매고 내게 비추는 빛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불신과 의심, 부정적인 모든 것들에 대항하였고, 아내로서 엄마로서 포기하고 싶은 모든 심정 앞에 그럼에도 나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집안일을 했다. 사랑으로 점철된 과거의 시간이 흑암으로 덮어져 버렸기에 더 이상 사랑할 힘이 내게 남겨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들려오며 느껴지는 나를 향한 크고 작은 사랑에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오다 보니, 나의 마음속에 기적이 일어났다. 새로워진 땅에 비가 오고 햇빛이 비추더니 사랑이라는 열매가 다시 피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랑으로 내 남편 그리고 아기 아빠와 소통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나는 더 이상 우리가 행복했던 지난 수년의 기억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그 기억들이 잠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적어도 너를 향한 나의 기본 토양, 나하고 상관이 있든 없든 '너'가 잘 되기를 바랐던 내 마음 중심은 그대로인 듯하다. 그렇기에 나에겐 우리가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너에겐 돕는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남편과 아기에게 하나뿐인 내 자리를 지키는데 최선을 다할 힘이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껏 오랫동안 내 청춘을 바쳐 꿈꾸던 나의 길은 이상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하려던 모든 것들은 이상이었으리라. 더 이상 무언가를 하려 하고 싶진 않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따뜻한 세상의 전부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나는 적어도 나 자신에게 떳떳하게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렇게 살아야만이 '너'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