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떤 형태의 가족인지에 대한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가족'은 나의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과 존재 자체가 우리의 뿌리로서 깊디깊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일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관계로서 존재하는 '가족'은 때론 큰 힘으로, 때론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사실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지 않을까? '선물'자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화려한지 볼품없어 보이는지 어떤 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경험한 대로 다르게 말할 수 있고 또 언제나 그 의미가 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또한 그 선물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내 마음속에 어느 위치에 얼마만큼의 범위로 함께할 지에 대한 건 각자에게 달려 있다. '나'라는 주체와 '가족'이라는 그 큰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져 있는 모든 연결고리의 갖가지 점성들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것 역시 각자가 터득해야 할 일이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며, 나의 원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세 가지를 배우게 되었다. 첫째는 '사랑', 둘째는 '긍휼, ' 마지막 셋째는 '감사'이다. 먼저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나로 하여금 늘 앞만 보게 하였다. 그 사랑은 뒤를 돌아 부모와 형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걱정 어린 마음을 늘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고 오히려 나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는데 몰입하게 하였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나는 부모의 큰 사랑에 힘입어 세상을 향해, 더 나은 나를 위해 앞만 보고 전진할 수 있었다. '그 사랑에 보답하리라'는 마음은 내가 앞만 보고 가는 것에 더욱 집중하게 하였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아버지의 책임감과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보살피던 어머니의 모성애는 우리에게 다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심은 그 사랑의 열매는 나 개인의 앞날의 성공과 같은 것에서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말로써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열매는 우리 가정이 모든 풍파와 갖가지 사건들 속에서도 지금과 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깊어진 세월만큼 깊어진 관계로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된 것과 같이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 그 자체였다.
내가 부모가 되니 이제야 나의 부모님이 보인다. 이제 내게는 부모님이 갈구어 놓으신 이 열매로 인해 부모님께서 슬픔의 눈물보다 기쁨의 환한 미소를 지으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부모님이 연로해질수록 더욱 깨끗하게 더욱 단정하게 더욱 풍요롭게 가족을 돌보아 남은 평생의 주어진 시간 속에서 그들의 마음이 갑절로 편안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노력하고 싶다. 그럼에도 사실 '사랑'은 아프기도 하다. 특히, 가족 구성원들 관계 속에서 '사랑'은 우리의 마음을 저며오게 한다. 우리의 심장은 때로 너무 가까이 맞닿아 있는 듯하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서로의 모진 부분으로 인해 상처가 생기기도 하고, 가족의 아픔은 그대로 전가되어 나의 심장을 또 한 번 아프게도 한다. 우리네 불안정한 가정들이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의 자아를 불안정하게 하는 이유들 역시 우리의 심장이 너무나 가까이 있어 하나로서 함께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 불안정함과 혹은 가족 내의 상처들은 어쩌면 사랑 때문에 생긴 것도 있기에 우리의 불완전함이 우리의 사랑을 모욕하지 않도록 좀 더 지혜롭게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또한 강렬하기에 특히나 더욱 강한 가족의 사랑에 대하여는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나 자신이 정말로 지혜롭게 가족을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행할 때에 그 가족은 이 세상 속에서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진 가정 속에서 또 하나의 귀한 기둥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약하고 초라해 보일 때, 나를 가엾게 바라보는 시선들 속에서 가족이 보낸 '긍휼'은 유일하게 동정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저 그 눈빛을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조심스레 감싸주는 위로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 눈빛 속에서 반짝이는 물결을 만들어 주는 것, 그 '긍휼'은 서로를 위해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의 안위를 바라는 것, 그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 부단한 노력 속에서 나의 노고에 대하여 수많은 이유를 붙여서라도 갑절로 인정해 주는 것, 결과에 상관없이 날 끌어안아 주었던 것, 이 모든 것들은 나를 향한 부모와 형제의 사랑, '긍휼'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뒷받침해 주는 '긍휼'은 울렁이는 파도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기력이 빠져 쓰러져 있을 때 물 한 모금이, 죽 한 수저가 기운을 차리게 하듯, 나를 살아나게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못났다 느껴지는 가족이어도 나를 헤치지 않는 적정선이 보장된다면 어떤 모습이든지 가족이기에 보낼 수 있는 그 눈빛을 잃지 않고 때로는 내가 먼저 '긍휼'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바라봐준다면, 이 세상을 데워줄 '따뜻함이라는 씨앗'을 곳곳에 풍성하게 심을 수 있지 않을까?
아기를 낳고 감사함이 부쩍 많아졌다. 잠을 잘 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감사, 아기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뛰놀 땐 더욱 감사, 이런저런 감사들이 정말 부쩍부쩍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감사해야 할 것은 '가족'의 존재였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내 부모님이어서, 오빠가 내 오빠여서 감사하다는 그 의미를 넘어서 이 세상에 아무 연고 없이 태어나 버렸는데, '가족'이라는 존재가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은 그 아기에게 아빠와 엄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 속에서 뉴스로 들려오는 갖가지 듣기 힘든 가족 간의 사건들 혹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들 앞에 우리는 더욱 진심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는 '어떻게 가족이? 어떻게 부모가? 어떻게 사람이?'와 같은 격분이 일어나는 내용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들 또한 가족이니 감사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모와 형제가 어떤 성격을 하는 어떤 사람들인지하고 상관없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공평하게 혼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 공평함이 우리가 어디에 속하든지 혼자라 느껴질 때 외로워하지 않고 당차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감사했다. 그 용기는 나의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깊은 감사의 토양이 될 수 있기에 내가 그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내가 이 땅에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감사로 덮는 '보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