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보로 빵 기억
강의와 코칭 등 일정이 연달아 있거나 아예 연수원에 들어가 3박 4일씩 교육을 진행해야 할 때가 있다. 누가 그러던데 잘 모르는 다수의 인원 앞에서 강의를 하는 일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충격 정도 되는 일이라고.
그럼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는 만신창이가 되었을까.
많이 긴장되는 일은 맞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 아니겠나. 하물며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전달하거나 주장을 펼치는 일이 강의다. 어중간하게 마음먹고 달려들었다가는 박살 나기 쉽고 정신까지 탈탈 털리기도 한다.
긴장할 것을 아니까 나름의 준비도 많이 한다. 강의의 큰 틀을 기억하고 맥락적인 흐름을 트레이닝한다. 반드시 미리 시간을 떼어 강단에서 실전 리허설도 한다. 자동차 사고가 날 것을 예상하고 사전에 스스로 조금씩 사고를 당해본다고나 할까.
오랜 시간의 준비와 리허설 등으로 사고를 치밀하게 예상한다. 아주 약간의 적절한 긴장감과 설렘을 남긴 채 모든 시나리오를 머리와 마음에 넣고 강단에 선다.
많이 하고 오래 하며 반복하는 것 만이 능숙의 길이라 믿고 있다.
능숙의 길로 향하는 내 모든 발걸음을 보았고 기억하고 있는 존재, 바로 아내다.
남편이 하는 일에 관심이 끊어지지 않도록 나는 최대한 자주 아내에게 내 일터를 보여주곤 했다. 아예 강의장에 초대해서 참여자로 참가하게 한 적도 있다.
귀가해서 진행했던 교육장에서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주며 강의의 맥락을 설명해주기도 하고, 아쉬웠던 점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아내는 내가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곁에서 함께 한 사람이다. 초창기에 돈 한 푼 못 벌면서 강의할 때 나를 수용해 주었고, 그 이후에도 오랜 시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조차도 묵묵히 지지해 주었다.
변변치 않은 실력과 학위로 인해 지방을 돌며 고가의 교통비를 감수하고 저가의 강의를 하던 나를 참아주었고, 부족한 역량을 채우기 위해 학업과 강의에 주말을 통째로 소모하는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 세월이 15년이다.
마음이 어려웠다. 열심히 살고 있는데 확신이 없었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 일을 할 때 가장 나답다고 말해주었다. 그 길로 묵묵히 가라 이야기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이다.
아내는 확신이 있었을까.
완성의 꿈은 없었지만 감사히 능숙의 길을 걸어왔다.
꾸준히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내의 지지 때문이리라.
짧은 연애와 결혼, 이후 이혼을 고민하던 여러 상황 속에서
내가 가정을 지키고자 마음먹고, 아내와 헤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나를 향한 나조차 없는 확신을
아내는 내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어느 날-
교육장 간식으로 올려져 있던 소보로 빵을 하나 챙겼다.
거의 매일 늦는 날 위해
바로 쓰러져 잘 수 있도록 침대 옆 이부자리를 준비해 주는 아내가 고마워서
교육장에서 챙겨 온 소보로 빵을 먹을 수 없었다.
소보로 빵은 연애시절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빵인데,
싸구려 빵을 좋아한다며 장난스레 핀잔을 줬던 기억이 난다.
나는 만일 아내가 내 곁에서 사라진다면
소보로 빵이 생각나
빵 집 근처도 지나지 못하겠지.
부서질까 싶어 최대한 조심스레 집으로 옮겨 왔는데
아침에 아이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비밀스레 아내의 가방에 넣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