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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Aug 24. 2023

2. 코칭계약을 거부한 조식미팅

일주일 후


일주일 뒤에 변상무를 다시 만났다. 꼭 사무실로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사석에서 나누는 대화는 사교다. 종류가 무엇이든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그러나 사무실에서의 만남은 더 이상 사교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작은 주제일지라도 업무인 셈이다.


변상무는 제일 친한 대학선배와 많이 닮았다. 나이도 같다. 한 가지에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고 지적호기심이 강했다. 다방면의 책을 두 세권 선정해서 일주일 만에 읽고 날 만날 때마다 브리핑을 하는 것을 즐겼다. 


내가 '상무님은 제 대학선배와 많이 비슷합니다'라고 말했음에도 내게 한결같이 깍듯했다. 어설프게 반말을 하거나 단 한 번도 나를 낮은 사람 대하듯 하는 뉘앙스를 풍긴 적이 없었다. 나를 전문가로만 대했다. 나 역시 변상무 앞에서 올곧게 전문코치로서 대면할 수 있어서 좋은 마음이 있었다


보통 임원이나 CEO를 만나면 내가 코치 외에도 여러 가지 캐릭터가 장착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무기처럼 필요하면 캐릭터를 불러오면 되니까. 


대부분 가벼운 골프 이야기, 전국 맛집 이야기, 건강 이야기들인데, 나는 내가 골프장에 발을 디딘 적이 없고 미식가에 맛집 수집광이 아닌 것이 아쉬웠다. 그들만큼 잔병이 없어서, 탈모나 관절상식을 비롯한 다양한 건강정보가 없다는 것이 담소가 뚝뚝 끊기는 원인이 되곤 했다. 


변상무는 인간관계의 각이 분명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만나면 나에 대한 간단한 안부와 함께 대부분은 자신의 일, 조직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다고 이야기들이 딱딱하거나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그가 안고 있는 책임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짊어지고 있는 리더다. 마음으로 하는 대화는 언제나 촉촉하다.


촉촉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임원은 드물다. 





펭수와 도시락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오전 8시 30분.

출근시간이다. 사옥의 1층 입구에서 보안을 해결하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안은 처음 보는 얼굴들로 가득하다. 그들 끼리는 대부분 아는 사이. 나는 손님인가 이방인인가. 


문이 열리고 사무실 입구에서 변상무를 보았다. 놀라서 뒷걸음 칠 뻔했다.

변상무는 펭수차림에 앞치마를 두르고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었다. 도시락과 음료가 질서 있게 깔려있는 테이블 옆에는 웬만한 성인크기의 엑스배너도 비치되어 있다. 


오늘 출근하는 이 회사의 모든 임직원은 펭수 차림을 한 변상무가 나눠주는 도시락을 받고 엑스배너를 보며 사무실로 입장하는 거다.  


'변펭수가 쏘는 아침! 맛있게 드세요'라는 문구가 엑스배너에 선명하게 쓰여있다. 펭수의 몸에 변상무의 얼굴을 편집해 넣은 사진이 문구와 조화를 이룬다. 몇몇 센스 있는 직원들은 도시락을 건네받기 전 변상무를 촬영하기도 하고, 옆에 서서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조명도 있고 음악도 틀어놨는데 요즘 유행하는 비트 빠른 댄스음원들이다. 젊은 직원들은 자연스레 저마다 귀에 꽂고 있던 무선이어폰을 빼며 도시락도 받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다. 나는 변상무의 표정을 살폈다. 쑥스럽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은 듯 펭수 흉내도 내며 자연스레 직원들과 담소 나누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고 있는데.


변펭수 아니, 변상무 옆에 나란히 서 있던 방귀대장 뿡뿡이 차림을 한 어느 남직원이 내게 와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김박사님 이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HR팀장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아침조식 이벤트를 하는데 이번달 담당이 변상무와 본인이라고 얘기하며 자꾸 팔로 몸을 가려보지만 뿡뿡이는 허리둘레가 꽤 있지 않은가. 가려지지 않는다. 


캐릭터와 콘셉트 선정을 위해 두 차례나 팀회의를 했다며 내 도시락은 이미 변상무 방에 가져다 놓았다고 빠르게 이야기를 한다. 음악 소리는 크고 HR팀장의 말도 빨라서 그다음 말을 놓쳤지만 대충 변상무 방을 안내해 줄 테니 가 있으라는 이야기 같았다. 


'아! 오늘은 조식미팅인 거구나'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변상무 방에 들어갔더니, 회의 테이블 위에 도시락과 음료가 놓여 있다. 손을 얹어보니 도시락은 아직 뜨끈하고 음료는 차갑다. 


온도차이가 확실한 아침이다.






 

캐주얼 정장으로 환복 한 변상무가 돌아왔다. 테이블 한편에 놓여있는 커피머신에 캡슐을 넣고, 


"아! 김박사님 카페인 못 드신다고 했죠? 가만있자. 디카페인 캡슐이 어딨 더라"


비서가 가져다준 후식용 과일까지 먹고 나서야 요란했던 도시락 조식타임이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변상무는 회사가 다시 회복될 수 만 있다면 펭수보다 더 한 것도 할 것이라며 웃었다. 


변상무는 오늘 대화는 왠지 나의 코칭적 관점이 묻어 있을 것 같으니 코칭 계약을 먼저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제안을 했다. 


"시간이 금인 것은 저나 박사님이나 마찬가지잖아요"


내 시간을 존중해 주는 귀한 배려이다. 더불어 본인도 자신의 시간을 금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조직이던 임원의 시간은 영향력이 크다. 의사결정을 하는 한 시간이 향후 조직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라. 


어쩌면 내가 하는 코칭의 본질은 임원에게 양질의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이 시간을 통해 3개월 후 회사의 미래가 결정되기도 하는 거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상무님, 오늘은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고 싶어요. 지난주 상무님과 나누었던 대화 소스들을 놓고 생각해 보면서 들었던 영감이랄까요. 코칭계약은 오늘 말고, 어느 정도 사안의 방향이 정해지면 진행하시죠. 저도 여기 놀러 온 건 아니지만 상무님께서 제 시간을 존중해 주시고, 아침밥도 이렇게 든든하게 얻어먹었으니 충분합니다."


본인이 오라고 했는데,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변상무의 말이 따뜻하다. 변상무의 코칭계약 제안을 거절한 나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오늘 만남은 코칭이 아닐 것이기에 코칭계약을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하고, 이 회사가 당면한 일들이 변상무 한 명을 코칭한다고 크게 달라질 가능성은 적다. 


변상무 말대로 하면 당장은 수익이 생겨서 나는 좋을 것이다. 오늘 할애한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면 그만이다. 임원코칭은 비용이 상당하다. 오늘의 대화는 코칭이 아니고 그저 나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코칭이 아닌데 코칭비를 받는 것을 허용할 수는 없다.


 나 좋자고, 이 이른 아침에 이곳을 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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