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되기 쉽네
둘째는 2년째 드럼을 배우고 있다.
처음 둘째가 드럼을 접한 건 4년째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였다. 피아노학원 원장님께서 학원 한편에 드럼실을 마련하고 저렴한 비용에 드럼 초보 과정을 개설하셨다.
피아노를 배우는 학원생들만 참여할 수 있는 드럼수업이었던 거다. 그것도 저렴하게.
둘째는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빼지 않는 태도가 돋보이는 아이.
부모가 혹할만한 매력이다. 배움을 권유했을 때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
그때가 계기가 되어, 지금은 피아노는 그만두고 드럼만 배운다.
그것도 학원을 옮겨 전문 드럼 선생님께 교습을 받고 있다.
수업 마칠 무렵, 나는 둘째를 데리러 간다.
날 보자마자 드럼채와 악보를 던지듯 건넨다. 실컷 두드렸는지 드럼채 한쪽이 많이 닳아있다.
배고프다고 한다. 뭔가 대가를 바라는 눈빛.
아니 내가 드럼 배우라고 등 떠밀었나.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고선 수업이 끝날 때면 이렇게 고자세다.
얼굴에 마라탕이 먹고 싶다고 쓰여있다.
원하는 건 다 주어 담을 수 있는 카페테리아의 매력이 있는 곳.
골라 넣는 재미와, 칼칼하고 톡 쏘는 향과 걸쭉한 맛에 늘 만족도가 최상이라
뭔가 심리적 보상을 얻고 싶을 때
둘째가 어김없이 찾는 곳은 마라탕집이다.
드럼을 신나게 치고, 매운 마라탕을 먹는
자극적인 토요일 오후.
음식 나오길 기다리던 둘째가 시크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건넨다.
"아빠 우리 집 부자야? 우리 반 아이들 전부 다 드럼 배우는 건 아닌데"
"허허. 그래.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 부자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한창 돈, 아빠연봉, 집값.. 이런 거에 관심이 생길 나이인가? 아님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누구네집 돈 많다느니 적다느니 이런 이야기들 하나. 순식간에 별 생각이 다 드는데,
"음.. 아빠. 나는 부자는 그냥 돈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고 멋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아! 그래?"
(되게 기대된다.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그치, 우리 반에 내 친구 걔 있잖아. 돈 많고 뚱뚱한 얘. 걔랑 얼마 전에 마라탕 먹었거든. 나는 걔네 집이 돈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거든. 근데 걔 부자였어"
"와~ 돈도 많은데 뭔가 달랐나 보네?"
"어! 아빠 걔는 있잖아. 마라탕을 이렇게 한 그릇 먹잖아. 그러면 먹다 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맛이 아닐 수도 있잖아. 예상보다 맵다거나 뭐 그런 거."
"그치. 원래 마라탕도 매운맛, 아주 매운맛, 덜 매운맛.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막상 먹어보면 생각보다 덜 맵거나 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치! 그치! 근데?"
"걔는 있잖아. 한 그릇을 거의 다 먹었는데, 다 먹어가는데 자기가 먹은 게 좀 덜 매웠던 것 같다고. 새로 하나를 또 주문하더라고. 더 매운맛으로. 새로 다시 먹겠다고."
"헐!"
"아 그거 보고, 걔는 진짜 부자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냥 새로 하나 또 주문을 하다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지? 이미 한 그릇 다 먹어갈 때였는데. 부자는 다른 것 같아"
;
;
;
잉.
몽롱하다.
이건
친구 디스인가, 부럽다는 건가.
'마라탕 먹어보고 맛이 안 맞으면 새로 주문하는 것.'
둘째가 경험한 부자의 모습!
부자가 무엇이고, 그건 취향 문제일 뿐이고, 걔네 부모님이 분명 식당에서 그렇게 먹는 것을 그 친구는 경험했기에 그럴 것이고, 사실 그건 지나친 소비 일 수도 있고, 걔가 그러니까 뚱뚱한 거고...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둘째가 경험하게 될 세상 속의 일들을 나는 결정할 수 없다.
둘째의 하루 일과 중 내가 보는 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친구가 부자가 맞다. 틀리다. 부자는 이런 거다 저런 거다 하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생각은 경험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둘째 역시 내게 부자의 정의를 묻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이 부자냐는 진지한 물음 또한 아니었다.
'아빠 지금 저는 살면서 그런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있어요.'라는 이야기일 뿐.
그래서 아직은 섣불리 가르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이제는 넌지시 알려주고 보여줘야 할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가 책을 구입할 때 같은 책을 왜 두 권씩 사는지, 그리고 산지 반년 정도 지나면 두 권중 한 권은 어디로 사라지는지.(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종종 선물한다)'
'필리핀 오지에 양육하는 동갑내기 남자아이에게 매달 보내고 있는 선교헌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그 가족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한창 코로나 때, 엄마가 왜 평소보다 장을 두 세배를 보고, 늦은 밤까지 밑반찬을 만들어서 아파트 앞동, 뒷동으로 실어 날랐던 건지.'
대부분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것이다.
만일 둘째가 진지하게 궁금하다고 다시 묻는다면
기회가 주어진 거라 여기고 이렇게 말해줄 생각이다.
"아가~ 마음에 사랑이 많고, 베풀 수 있으면 제일 멋진 부자야. 요즘 세상에서는 오히려 부자 되기 쉬울 수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