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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Sep 02. 2023

우산도둑은 젊은 남자였어요

인내와 용서, 그리고 보상

우산도둑



헬스장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산을 잃어버렸다. 

누가 가져간 것이다. 


7월 중순, 장마가 한창이던 무렵이었고 

나는 한창 루틴형성에 열을 올리며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헬스장부터'를 실천한 지 열흘즈음 되었을 때다.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헬스장까지 걸어가는 5분의 거리도 쉽지 않았다. 우산을 썼지만 온통 다 젖은 채 헬스장에 입장했던 기억이다. 


내 우산은 전 직장을 퇴사할 무렵,

동료들이 기념으로 챙겨준 소중한 물건이다. 손잡이에 회사로고와 문구가 적혀있다. 

명품우산 아니고 비싸 보이지도 않지만 내게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는 소중템이다. 

우산을 보면서 내가 오랫동안 근무했던 회사와 팀원들을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유니크하다.


그날 그 우산을 가져갔었다.

그리고 누군가 가져갔다. 


운동을 마치고 나가는 길,

우산을 두었던 우산꽂이함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거다. 

노안이 온 건가. 왜 못 찾고 있나.


내 우산은 손잡이에 회사로고와 문구가 적혀있는 리미티드 에디션!

보면 못 알아볼 리 없다.   


혼자 안절부절, 10분간 우산함을 바라만 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잃어버렸다'


헬스장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알아보고 다시 얘기해 주겠다고 했지만 무소식.

며칠 후, 나는 다시 데스크에 가서 헬스클럽 사장님에게 또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을 어디엔가 적어두긴 하더구먼 또다시 무소식.


나는 이렇게 일주일을 소비했다. 

이 일로 나는 헬스장 사장과 직원들 총 5명에게 같은 말을 해야 했다.

나중에는 그냥 내가 직접 찾아볼까 싶어서 A4에 글과 사진을 넣어 '분실물을 찾습니다'라는 헤드라인으로 딱 만들어서 헬스장 벽에 붙일까도 고려해 보았다.


이거 한 장 만들까 고민하는 것도 에너지가 엄청 소모되더라.

마음이 안 좋으니까. 


젊은 남자


마침 그날, 헬스장 직원 한분으로부터 CCTV를 통해 분실상황을 파악해 내었다며 연락이 왔다.

냉큼 가서 확인해 보니 30대 즈음의 젊은 남자다.


나오다 안 나오다 하는 회원님이라 기약할 수는 없지만 

직원들하고 회의해서 인적사항 확인하고 전화를 해보겠다 했다. 


헬스장 직원이 통화를 했다고 한다. 

젊은 남자는 본인의 우산을 가져간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냥 부인해 버린 거지.

손잡이에 로고며 문구며, 딱 보면 본인 것이 아니란 걸 알 텐데.. 

직원은 난처해했다. 

나는 일단 알겠다고 했다.


우산 하나 갖고 이 난리를 치냐고 생각할 거 같아

나는 다시 헬스장 직원에게 우산에 담긴 스토리텔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상기를 시켜줘야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아서.

직원이 무슨 죄랴. 본인 잘못도 아닌데 내 잔소리까지 들어야 하고.. 미안했다. 


그리곤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조금 지났다.


나는 헬스장 입구에 있는 우산보관함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아침마다 비가 자주 내렸고, 나는 우산보관함을 매일 체크하게 되었다. 


'아.. 이제 잊어야 하나'

'다시 움직여야 하나'


젊은 남자에겐 그저 그냥 그런 우산이겠지만 나에겐 소중한 의미. 

나는 이 일을 접지는 못하겠구나 하던 찰나.


그날도 비가 엄청 내렸다. 무슨 태풍이 상륙 중이라던데,

나는 태풍이 올지라도 아침 운동루틴을 지키는 사람.


한창 운동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우산보관함을 지나가는데

혹시..

혹시..


아직 노안은 아니구나.


도난당했던 우산이 버젓이 비닐봉지를 입고 우산보관함에 꽂혀 있는 것 아닌가.

온몸에 전기가 오는 것 같다. 찌릿.


그렇다.


지금 헬스장 안에 

우산주인인 나와

우산도둑놈 젊은 남자는

한 공간에 있다.


심장이 뛰었다. 런닝 뛸 때보다 심장이 더 뛰었다.

아드레날린이 막 분출되고 있는 상상이 이어진다. 


난 품위 있는 사람이니 경거망동하지 말아야지.


데스크에 가서 직원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린다.


직원도 눈이 휘둥그레!


"저 지금 흥분해서 말빨라지는거 아시죠?"


"회원님! 어떻게 할까요? 저도 지금 막 너무 놀라서 뭘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운동은 다 하신 거예요?"


"네 오늘 운동은 이 정도 하려고요. 여하튼 지금 이 공간 안에 우산도둑이 있는 거잖아요!"


"그쳐. 맞죠 맞죠. 와 이거 참 이런 일이.. 제가 일단 우산을 이쪽 제 자리에 놓을게요. 우산이 없어진 거 알면 그분이 제게 오시겠죠? 그럼 이야기 나누고 점장님한테 보고 하고... 머 머머 하고 제가 회원님께 전화를 드릴게요"


"네. 그래주시겠어요. 부탁 좀 드릴게요. 여기 우산은 직원분께서 좀 보관해 주세요"


"네 회원님.  근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한 달 넘게 마음을 쓰고 계셨잖아요. 찾아서 너무 잘 된 일 이긴 한데, 그분 고소하셔도 그분은 할 말 없으실 거예요. 이 일로 엮인 사람만 총 여섯 명이잖아요. 그리고 되게 이상한 게 그렇게 가져가고 오늘 또 아무렇지 않게 갖고 오신 걸 보면 참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러게요. 일단 전화를 주시면 제가 이야기해볼게요. 이유가 있겠죠. 일단 찾았으니 다행이네요"


진정이 안 되는 마음으로 헬스장을 나왔다. 


그 젊은 남자는 나를 모른다. 나는 젊은 남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직원은 나보고 가지 말고 기다렸다가, '우산도둑 젊은 남자'를 만나서 그에게 사과를 받으시겠느냐고 물었다.


헬스장 안에서 대면으로 사과를 받는다면 

이 일로 그와 내가 같은 시간대에 운동을 하게 되는 날은 

둘 다 신경이 쓰일 것이다.

어쩌면 이 일이 나의 운동루틴을 말아먹을 수도 있는 일. 


나는 마음 편하게 운동하고 싶다. 

살면서 이렇게 규칙적으로 한 달 넘게 그것도 매일 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 


소중한 의미가 담긴 우산이었고, 타인에게 의미를 빼앗겨버릴 뻔해서 마음 졸였지만

지금 새로운 운동루틴에 대한 의미도 현재의 나에겐 중요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우산도둑과의 통화



오후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젊은 남자다. 


나는 질문했다.

"왜 그러셨어요?"


[젊은 남자]

1. 그날 본인 우산이 없길래 그냥 비슷해 보이는 내 우산을 쓰고 집에 왔다. 

 - 본인도 우산을 잃어버렸던 것. 그렇다고 해서 도적질이 합리화될 리 없다. 


2. 그날 이후 일주일 뒤에 헬스장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cctv에 찍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생각하기 귀찮고 이게 그렇게 큰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얼버무렸다. 

 - 내 참.. 기가 막히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네.  


3. 오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그 우산 쓰고 나와서 운동했는데, 집에 갈 때 사라졌길래 이상하다 싶어서 직원과 이야기하던 중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4. 정말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안일한 사람이구나.'


통화초반-

젊은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괘씸한 마음이 온몸 사방에 퍼진다. 

한 달 보름정도의 시간이었다. 나름의 스트레스와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


통화 중, 후반-

그런데 통화를 하며 나는 어느새 마음이 풀리고 있었다. 


반전서사!

그것은 그의 사과에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사과의 정석이라 표현해도 무관할 정도로 나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대해 몇 번이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런 사과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좀 엉뚱한 말을 내뱉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좀 하시나 봅니다."

(헐.. 이게 무슨)


"네. 직장 다닙니다."


아니. 내 말은 당신이 어떤 사회생활을 하냐는 질문이 아니었고.. '사회생활하며 사과 좀 해봤니?'라는 뜻이었는데..

너 사과 좀 잘하는 것 같다..라는 표현이었는데..




용서



훔치려 한 의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훔치고자 했었으면 오늘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우산을 쓰고 왔겠는가.

그는 그냥 안일한 사람인 거다.


전화통화이긴 하지만 그의 진심이 담긴 사과와 태도에 

나는 그를 용서를 했다.


만일 변명만 하고, 좋지 않은 태도의 말투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그는 일생일대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나게 되었으리라 


그는 안일한 성향으로 잘못을 저질렀지만 내게 진정성 담긴 사과를 했기에, 이후 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내했고, 사과받았고, 용서했다. 

더불어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나는 약하다는 것을.


그리고,

대면사과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찰나의 선택이야 말로 금 같은 경험이 되었음을. 






오늘 탈의실에서 젊은 남자를 봤다.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건너편 옷장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즐거운지 노래를 흥얼거리더라.

나는 '이 녀석아! 다시는 남의 우산에 손대지 말거라' 하고 속으로 말하고 있지만, 표정은 미소 짓고 있더라.


탈의실 거울을 보니,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와 내가 한 앵글에 담겨 있더라.  

옷은 둘 다 홀라당 벗고는.

 

그는 나를 전혀 모른다.

'안일한 30대 젊은 남자 녀석아! '


상황이 좀 짜릿하다. 

인내해 온 것에 대한 보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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