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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엘 Aug 25. 2023

아내와 친구가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아내의 여행

아내가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고등학교 절친 동창친구 세 명과 함께 하는 여행이다. 가족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을 손꼽아 기다릴 만큼 아내는 여행 자체를 좋아한다.


KTX를 타고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향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어제는 콧노래를 다 부르더라.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여 덩달아 나도 즐겁다.  


이른 아침, 나는 아내를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한다. 

인근에 사는 동창친구 중 한 명을 픽업해서 함께 기차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무슨 말을 해도 깔깔대고 까르르 웃는 모습들을 보니 여고생들 같다. 세월을 거스르는 광경.  


아내를 이십 대 초반에 만나 사귀었으니, 오늘 함께 여행을 가는 친구들도 그 무렵 소개받았던 거구나. 20년이 흘렀네. 친구를 만난 아내의 편안한 모습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이다.  


친구가 날 부르는 호칭은 '오빠'다. 

친구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 절친의 남자 친구가 나였을 거고,  나 역시 이 친구에게만큼은 말을 놓아도 아무렇지 않다.

결혼식 때 내 아내의 들러리를 서 주었던 친구다. 그냥 편한 사이들이다. 반가운 나는 아내의 친구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

 "이야~ 오랜만이다. 참 변하질 않아. 옷도 센스 있게 잘 입고. 처녀 같다 너는."


친구:

 "어! 오빠 진짜요? 고마워요."


인사한 거다. 나는. 

물론 진심이 담겨 있는 칭찬이 가미된 인사.


실제로 친구는 자기 관리를 해와서 그런지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있음에도 미모가 세련됐고 '미스'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인사는 딱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아내가 옆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말도 정도껏 해야 한다. 아내가 보고 있다.  







사실 이 정도 라이트하게 주고받는 인사는 삼십 대에도 했었고, 사십이 넘어서도 친구를 만날 때마다 종종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친구의 반응이 좀 다르더라. 친구가 말을 덧 붙인다.


친구:

 "오빠 진짜 그래요? 제가 아가씨 같아요?"

(잉? 아가씨라고 한 적은 없는데. 처녀 같다고 했지.)


나: 

"들었잖아. 왜 또 물어보지? 두 번 얘기해 달라는 건가. 어째 뉘앙스가 또 듣고 싶어 하는 거 같은..."


친구&아내: 깔깔, 크크 


친구:

 "맞아요, 오빠. 요즘 너무 못 듣고 살았나 봐. 누가 나보고 아가씨 같다고 해줘야 말이지. 깔깔


그렇다. 예쁘다는데 싫어할 여자가 계시겠는가. 


삼십 대 때도 비슷하게 주고받았던 칭찬이고 인사였건만 오랜만에 너무 반가웠었나 보지. 이렇게 다시 잡아당겨 와서 되새김질하고 싶어 하는 친구의 인정욕구가 이해가 되어 함께 웃는다,


그렇다. 나이들 수록 좋은 것은 더 많이 그리고 자주 표현하는 것이 좋다!







출근시간이라 길이 좀 막힌다. 그러나 일찍 서둘렀기에 기차출발 시간은 넉넉하다.


아내에게 애정을 담아 사소한 잔소리를 좀 한다.


나:

 "네 명이 기차 안에서 너무 떠들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기차 타면 우리 종종 보잖아 그런 거. 물론 마음은 이해해. 얼마나 즐겁겠어. 너무 즐거운 나머지 목소리 커지는 건 이해하지만 자기는 교양 있게 좀 자제하고 그래요."


아내:

 "에이, 나 그 정도는 아니야. 걱정 마"


친구:

 "그래 맞아, 오빠 말이. 우리도 조짐이 좀 있어. 떠들지 말아야지. 나는 그래서 넷플릭스 보려고 블루투스 가져왔지! 나는 솔로 나 봐야겠다"


아내:

 "어 그래? 그럼 나 귀 하나만 주라!"


친구:

 "오키~"

;

;

(헐)

;


나:

 "이게 뭐야. 허허. 아이고.. 난리 났네. 블루투스를 가져왔다고 하질 않나. 귀 하나만 달라고 하질 않나. 서로 알아듣고 의사소통이 되는 게 용하다!"

:

:


아내&친구: 

 "(박장대소) 깔깔깔깔, 커커, 진짜진짜. 헉헉 깔깔... 학학학" 


(진정 중..)



친구: 

 "그 머지? 머라고 하지?  내가 블루투스 라고 한 거. 깔깔깔"

 

나:

"무선 이어폰이겠지. 버즈나 에어팟?" (혼자 똑똑한 척)

 

아내&친구:

"(다시 박장대소) 블루투스를 가져왔데. 깔깔깔"


아내:

"나는 막 귀하나 달라고 그러고. 너는 또 알았다고 하나 준다 그러고. 깔깔깔.."


친구: 

 "(소리 못 내고 웃고 있음) 학학학"


나:

 "우리 셋 다 뭔 말인지 다 알아듣는 게 신기할 뿐이다. 하하하"



얘네들 여행은 시종일관 이런 일들의 연속이겠지, 아마.

예약한 호텔이 오성급을 넘어 육성급 정도 된다던데, 거기 가서도 품위있게 계속 껄껄 웃고 있겠지.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알아서 듣고, 웃고 넘기고,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속에 있는 말 다 털어놔도 뒤탈 전혀 없는 시간과 공간. 


언젠가 예전에 아내가 이 멤버들 만나고 귀가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만나면 그냥 넷이 계속 웃기만 해. 만나서 하는 건 그냥 웃는 게 다야. 근데 더 웃긴 건, 네 명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막 하는 거거든. 누가 들어주든 말든 말이지. 근데 전혀 신경이 안 쓰여."


아내의 이번 여행도 그렇겠지?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가볍게!


전에는 이런 생각도 했었다. 서로 예의가 너무 없나? 아니. 그런 이야기까지 한다고?


그러나 나는 안다. 그들은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허울이 없는 거다. 

아무 말이나 막 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은 상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웃고 끝. 딱 여기 까지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거다. 뒤탈이 염려되고 뒷말이 두렵다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내와 친구들은 이십 년 지기다. 각자의 연애와 결혼식에 모두 함께 존재했고, 출산과 자녀들의 돌잔치도 서로 알뜰하게 챙겨 오며 삶을 공유해 온 사이다. 가볍게 웃고 떠들지만 가벼운 사이는 아니란 것을 나는 안다. 

  







기차역 앞에 차를 정차한다. 도착했다. 내려주며 아내에게 묵을 호텔이 어딘지만 카톡으로 보내달라 말했다. 


돌아오는 아내의  대답-

"어! 도착하면 뭐 뭐 사 먹을 거야!"


엥? 웬 동문서답.

 

허허. 온통 머릿속이 여행으로 가득 차 있구나. 


나:

 "여보! 나사를 여러 개는 말고 하나 정도는 느슨하게 풀고, 잘 놀고 와!"


(아내는 벌써 멀어지고 있다. 못 들었나 보다. 이미 나사가 풀렸..)


차 안에서 혼자 웃었다.

허파를 진정시켜 본다. 아침부터 너무 웃어서.

여고생 같은 아내와 아내의 친구를 역에 내려주고 돌아가는 길. 


아내처럼 나도 느슨해지는 아침이다.

     



#이 글은 즐겁게 여행 중인 아내와 아내의 친구분들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사소한 에피소드 이지만 글쓰는 시간이 적진 않았어요. 아내를 비롯해서 한분 한분 떠올리며 시간과 정성을 담았습니다. 앞으로도 제 아내와 즐겁게 지내주시고, 행복한 여행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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