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내가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족 모두의 아침이 시작된다. 가족의 아침은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아내가 출근을 하는 시점, 즉 텅 빈 집에 강아지만 남게 되는 시간까지다. 대략 한 시간 반정도.
한 시간 반 동안 내가 보는 아내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자신의 출근 준비를 함과 동시에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아내 스스로 할 일들을 체크하며 동시에 나와 짧은 대화도 나눈다.
내가 정시출근을 하여 아침에 온전히 부재했을 당시에,
아내는 아침의 그 짧은 시간에 앞서 열거한 일들에 추가로 강아지 먹이도 주고, 강아지 화장실도 갈았으며 세탁기 돌리고 건조기에서 건조된 빨랫감을 가지런하게 접어 놓기도 했다.
고작 한 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혼자 일어나서 출근하는 일조차 버거웠던 나는
아내의 아침을 결코 알지 못했다. 무려 10여 년 동안을 모르고 지냈던 거다.
아내가 출근하기까지 한 시간 반을 어떻게 보내는지 나는 도통 알지 못했다.
회사 일을 정리하고 두 달째 가족의 아침시간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처음에 계획했던 나의 아침시간 콘셉트는
기상과 동시에 어슬렁거리며 노곤함을 떨치는 느긋한 아침을 기대했었다. 커피 한 잔에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며 책도 좀 보고 창 밖 하늘도 감상하는 뭐 그런 수채화스러운 상상.
현실은 상상과는 정 반대. 치열했다.
기상과 동시에 모닝똥을 위해 화장실에 가서 앉으려는 찰나에 아내가 말한다.
아내: "어! 지금은 안되는데~"
나: "엉?"
아내: "얘들 준비해야 하거든"
지금은 한가하게 똥이나 싸고 그럴 때가 아니라는 아내의 부드러운 충고에 잠이 확 달아난다.
그래도 내가 집안의 가장인데.. 모닝똥까지 양보를,,,
나: "화장실 두 개인데..."
아내: "얘들 다 써야 해서~"
아내는 이미 다 씻고, 화장도 했고, 머리도 마친 상태로 옷만 입으면 되는 준비율 90%의 상황.
내 모습이 초라하다. 그러나 멀티플레이어 아내의 말은 아침시간에는 법이다. 헌법을 지키는 마음으로 수긍해야만 한다. 가장으로서의 개똥 같은 자존심은 넣어두기로 한다.
아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라면 싸던 똥도 끊고 나가는 수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누구보다 아침에 솔선수범하는 아내가 아닌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에게 노할 자 누구랴.
나와 함께 사는 구성원은 아내에 딸 둘. 아침 화장실은 언제나 만원이다. 화장실 두 곳에, 각각 들어가서 나오질 않는다. 드라이기 소리가 요란하다. 머리 말리자 마자 거실과 주방을 순회하며 빗질도 한다. 여자 셋이 빗질을 하니 집안 바닥이 온통 머리카락 투성이다.
화장실에도 머리카락, 거실에도, 주방에도, 신발 신는 공간에도..
아니 내 서재 슬리퍼에는 어떻게 머리카락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2년 전 실내 인테리어를 했다. 아내의 바람을 담아 집안은 '화이트' 컨셉! 벽지와 바닥 모두 '화이트' 이다.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도드라지는 환경의 공간.
게다가 딸 둘은 고1, 초5-
딸들은 아침에 말이 없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데 그냥 말없이 알아서 등교 준비를 한다. 말없이 씻고, 말없이 머리 말리고, 말없이 밥 먹고, 별말 없이 등교한다.
"엄마, 갔다 올게!"
아내: "아빠한테도 인사하고 가야지!"
(10여 년 간 새벽출근을 했던 아빠였다. 아침시간에 아빠는 없었던 거지)
"간다!"
(내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게 하는 말인 줄 곧잘 알아듣는다)
나: "어~ 잘 다녀와! 오늘도 즐겁게 보내고! 아빠가 기도할게"
아이들의 뒤통수에 인사와 사랑을 보낸다.
처음에는 이 광경이 낯설었다.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나 싶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이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서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런데 언젠가 둘째가 등교하며 함께 만나 걸어가는 친구와 즐겁게 웃으며 학교에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이 되더라.
'아침루틴인 거구나'
아내의 출근. 상냥한 미소의 아내가 현관 밖으로 나가자
집에 홀로 남았다.
이제 고상하게 음악도 틀고, 책도 읽고 하면 된다. 화장실은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
하지만 한 시간 반 동안 몰아친 쓰나미의 여파가 마음에 남아 고상해질 수가 없는 나는..
몸을 움직이기로 한다.
오래 남겨져 있던 세탁물을 울샴푸 넣어 세탁기에 돌리고, 쓰레기들을 분류하며 베란다에서 한동안 노동을 한다.
아내가 퇴근하자마자 주방을 보고 기뻐할 표정을 기대하며 주방도 깔끔하게 정리한다. 냉장고에 오래된 반찬들을 정리하고 그릇과 컵들을 나란히 한다.
주방에서 노동을 끝내자 추가로 해야 할 집안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들 방, 거실 소파, 수납장, 안방..
아침식사는 건너뛰었다.
점심도 먹지 않았는데,
둘째가 벌써 하교하여 집에 왔다.
한 손으로 냉장고를 탄력 있게 열며 먹을 간식을 찾는다. 한동안 그렇게 냉장고에 얼굴을 파묻고 있더니 그냥 닫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본다.
다시 냉동실 문을 열고 한동안 안을 들여다보기만 한다.
'왜 이러는 걸까. 뭘 찾는 거지. '
둘째는 냉동실 문을 닫고, 다시 내 얼굴을 본다.
'아.. 뭘 사 줘야 하는가 보다.'
둘째의 손을 잡고 오늘 처음으로 집 밖에 나간다.
늦여름.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하는 길.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아이는 재잘거린다.
내가 다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는건가?
아빠는 그 말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하지만 즐겁다.
종일 혼자서 노동했지만
기존 회사일과는 다른 노동이었지만
아이의 재잘거림에 피로가 풀린다.
친구들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들 이름이 다 비슷해서 집중하며 듣는다. 이따가 아내에게 속성과외받는 심경으로 둘째의 친구들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다.
회사일에서 눈을 떼고
가족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런 시간이 언제 인생에 다시 주어지겠냐며 해외여행이라도 혼자 다녀오라는 아내의 고마운 제안을 사양하며 택했던 루틴이다.
내 가족 안에 깊숙이 들어가고 싶었다. 가장 말고, 아빠 말고,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동안 바쁜 사회생활 하면서도 이 정도면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었다 여겨왔다. 참 근거도 없는 당당함이 있었구나.
농도 있게 성찰한다.
'뭐만 하면 가족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뻔질나게 말은 해놓고..'
내 지난 삶은 팍팍했지만..
가족의 루틴은 안정감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아빠의 영향보다
엄마의 영향력이 흐르는 분위기에 감사하다.
느긋한 마음을 갖자. 지금부터 라도.
딸아이의 손결과 음색을 세심하게 느껴보자.
아내의 마음과 건강에 귀 기울이자.
아빠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며 울분을 품지 말자.
나는 내 자식들을 얼마나 존중해 왔는가.
아내에게는 또 어떻고..
눈을 바라보고
사랑한다 말하자.
표현부터 하자.
루틴은 단번에 만들어지는게 아니라고 하지만.
해보는 거지.
무엇도 늦은 때는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