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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그릇 Sep 09. 2021

여보, 나 작가가 되어야겠어!

 '나 왜 배가 안 고프지?'라고 말하면

남편이 대답했다.

'그럼 지금 안 먹어도 돼'


'나 왜 잠이 안 오지?'라고 말하면

남편이 대답했다.

'그럼 졸릴 때 자면 돼'


나는 남들 먹는 시간에 먹고,

자는 시간에 자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남편은 아니라고, 괜찮다고 했다.


잠이 오지 않던 어느 밤,

수없이 만났던 여느 밤들과 무척이나

닮아있던 그 밤. 나는 생각했다.

'글을 써야겠어'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만 썼다 지웠다 했던

수많은 문장들을 종이 위에 꺼내 놓아야겠어!


다음날 아침 시리얼을 먹고 있는 남편에게

여보 나 작가가 되어야겠어, 말했다.

남편은 시리얼과 함께 당혹감을 한 숟갈

씹어 삼키고

그래, 잘할 수 있을 거야,라고 서둘러 말했다.

착한 사람이다.

거짓말을 잘한다면 더 좋았을 것을.


쓸 말들은 많았다.

아니 많은 것 같았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문장들은

서로 앞다투어 튀어나오려 했다.

마치 문장들과 함께 길고 긴 기차여행에

나선 것 같았다.

목적지가 같은 문장끼리 줄 서서 차례차례 앞으로 나오면 좋을 텐데 기차만 섰다 하면

서로 내리겠다고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뒤죽박죽 한데 섞인 것을 얼르고 달래 각자 자리에 앉히고 돌아서면, 영영 잃어버린 문장들도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기차 출입문 앞에 두 발 뻗고

앉아있는데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옆에 와 앉는다.


왜 글을 쓰고 싶은 거야?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을까.

왜 일까.


2003년 노을이 예뻤던 어느 여름날,

오래 아팠던 아빠가 가던 길을 멈추고

혼자 돌아서 가셨다.

참 좋은 아빠였다.

나무처럼 키가 컸고, 나무와 비슷했다.

든든했고, 유쾌했고, 잘 베풀었다.


벌써 몇 번이나 반복했던 힘든 치료에 들어가기

전날 아빠의 곁에 있었던 건 나였다.

병원 앞 벤치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앉아서

아마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아빠는 말했다.

참 좋은 인생이었어.

엄마랑 결혼하고 너희 넷 낳고 모든 날들이

행복했어.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던 때는 없었어.

우연히 그 순간 내가 옆에 있었지만

그 말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빠 자신,

혹은 아빠의 삶에게.

시간에게.

우주와 창조주에게...

그 말들이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주인을 찾았기를.


장례를 치르고 집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물건들을 정리했다.

오래되어 먼지 쌓인 책들을 앞마당에 길게 늘여

놓았는데 그것들을 들추어보다가

아빠의 오래된 일기장을 찾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다가 한참 뒤에야 읽어보았다.


그 글들 속의 아빠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가난했고 아팠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동생들은 도와달라고만 했다.

이웃의 사람들은 아빠를 속였다.

공들여 심은 농작물의 값은 바닥을 쳤다.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뚜름하게 집을 지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걸음마를 했으며

아빠를 보고 웃었다고 했다.

어느 여름날은 바람이 시원했고 수박이 달다 했다.



삶은 힘듦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하루 중에도 하늘의 얼굴이 쉬지 않고 바뀌듯,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하며 하루를 가득 채운다.

아빠의 고백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사실이었고,

슬펐지만 아름다웠다.


가만히 앉아있는 그 질문에게 답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을 기억하고 싶어.

감정들은 창문을 열면 연기처럼 날아가버려.

우리의 하루하루는 서로 닮아 있기에

머지않아 비슷한 감정들을 또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것들은 미묘하게 다르고

그 순간이 아니면 영영 다른 것이 되어버리지.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

그 안에 슬픔도 기쁨도 그리움도

존중해 주고 싶어.



그러다가 어느 밤,

'나 왜 잠이 안 오지?' 말하려다

얇은 노트와 얇은 펜을 꺼내 들고

이 글을 쓴다.


'여보 안 자?' 착한 남편이 물었다.

'졸릴 때 자면 돼' 둘이 킥킥 웃다가

남편은 자러 가고,

나는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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