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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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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 Nov 30. 2018

하프마라톤

10월 21일 경주국제마라톤에서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달리기 시작한 지 6개월만의 쾌거다. 그 전까지 하프 완주 경험이 없는 나라, 그 날 따라 카페인의 힘으로 새벽 5시까지 뜬 눈이었다. 밤잠을 설쳐 아침밥을 먹고 쪽잠을 잔 후 8시 대회 준비를 했다.


실은 이건 아버지와 나, 동생의 마라톤 여행이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여행은 오랜만이다. 가뜩이나 국내 여행이라니. 그 전 날 황리단길의 카페에서 아버지와 동생과 라떼를 마시는데 내가 아버지와 이런 곳에 있다니, 새삼스럽다.


아버지와 동생은 10km, 나는 21.1km. 달릴 수 있을까 부담감이 컸다. 노원크루 단톡방에 하프 뛰러 왔다고 연락을 하니, 모두 응원의 한 마디를 보낸다. 온라인 응원인데 마음 하나 하나가 마음에 장착되었다. 아, 배번에 크루를 알리는 스티커를 안 붙였다고 크루장님께 난데없는 대회 시작 전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아무쪼록 10월의 말 쌀쌀한 날씨인데도 반바지를 입었다. 심지어 속옷도 필요 없는 러닝용 반바지다. 배번을 달고 기계를 통과하자, 삐-소리가 들린다. 달린다. 달린다. 1km, 2km. 거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일 때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달리면서 찍는다고 속도가 늦춰지는 것도 아니고, 달리는데 이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다.


음악을 들으며 달리는 편이 아닌데 음악을 안 듣는 게 습관이 되다보니 하프도 음악 없이 달린다. 경주의 첨성대, 월지 등 어제 다녀온 명소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아- 오르막길이 다가온다. 옆에 달리시던 분이 “고개 숙이고 달려요.” 조언을 주신다. “잘 달리네!”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


꽹과리 소리도, 길거리 응원단도 큰 힘이 된다. 러너들과 함께 달리는 패트롤을 멈춰 세워 발목에 물파스를 세번이나 칙칙- 뿌린다. 15km에 미리 준비해둔 에너지젤을 먹는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달릴 때 왜 바나나나 에너지젤을 먹는지 몸으로 느낀다. 초코바는 안 넘어간다. 씹을 수가 없다. 그나마 물렁거리는 음식이 들어간다.


18km. 완주할 수 있으리란 희망도 들고, 기록이 생각보다 좋다. 이러다 2시간 찍는 거 아닌가 하는 욕심도 든다. 오늘 왜 이리 컨디션이 좋지? 19km, 피니쉬라인에서 기다릴 동생과 아버지께 연락을 한다. “나, 곧 도착해!” 미리 대기하고 응원겸 완주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달라고 말했는데 너무 일찍 도착해서

혹여나 안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미연에 방지한다.


20km, 21km. 마지막 스퍼트를 올린다. 아- 그런데 이러다가 심장에 무리올 것 같다. 무리오기 직전 피니쉬라인을 넘어선다. 아버지와 동생이 응원해주러 온다. 다리가 이제야 후덜거리는데, 완주한 게 믿기지가 않는다. 공기, 오늘의 분위기. 완벽.


2시간 9분. 완주 메달을 받아 들고 계단에 앉아 간식을 까먹으며, 아버지와 동생도 기록을 15분 단축했다며. 오늘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더라며. 아버지와 동생은 나란히 달려 사진도 나란히 찍혔단다. 이렇게 나는 또 나의 한계를 뛰어 넘고, 대회에서 5km를 달리면서, 10km를 달리면서도 이상하게 안 힘든 오늘을 곱씹으며 마친다. “나는 마라토너다.”란 주문이 마법부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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