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지 못한 말들

외침은 있었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닿지는 못했다

by 지은담


비 옵니다. 소리가 사라지고 비가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호숫가 산책길.

어딘가에서 평온을 찢는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처음엔 시위라도 벌어진 줄 알았습니다.

“... 회개하라! 천벌이 임할 것이다!”

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가 보니,

산책로 한가운데

석상처럼 꼿꼿이 선 초로의 여인이

작고 가녀린 몸으로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 동성을 사랑하는 이들,

술집을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적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며

하나님께 천벌을 내려달라고 간청하고 있었지요.


확성기 하나 없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 소리 속에 깃든 비난과 저주의 기세였습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주점들이 줄지어 늘어선 호숫가 거리,

휘황한 조명 아래

가을밤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여인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그날 여인의 외침을 들으며

나 또한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말을

외로이 되뇌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허공을 향해 쏟아낸 그 말들 뒤에는

전하고 싶은 진심보다

공허하고 미숙했던 내 마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전, 존경하는 분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분의 인자한 말씀에

남편은 두 눈을 반짝이며 연신 감탄했지요.

그 반응이 못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내가 수도 없이 반복해 오던 말과 하나 다르지 않았지만,

남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맨날 하던 말인데…”


그때, 그분께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말도 다 때가 되어야 들리는 법이다...”

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말들엔

진심도, 신뢰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몇 번을 말해도

남는 건 되풀이되는 소리뿐이었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하는 말이라 믿었지만,

그 말들 속엔

내 무지와 욕심이 숨어 있었습니다.


닿지 못한 말은 울림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닿지 못한

나의 말은, 결국 공허한 소음으로 흩어졌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왜 나의 말이 울림이 되지 못했는지를요.

마음을 다해 다가가지 않았다면,

말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했습니다.


비뚤어진 마음엔,

아무리 곧은 말도 비뚤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심을 전하려면,

먼저 그 마음까지 닿을 길이 바로 열려 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그 길은 다름아닌,

신뢰와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쌓여가는 시간의 다리입니다.


진심은

말이 아닌 태도와 시간, 그리고 반복된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말하기보다 먼저,

귀를 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보니,

가장 가까은 사람에게 가장 많은 말실수를 했더군요.

예전 나는

가족에게 참견이 많았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그건 하지 마라, 저건 이렇게 해야 해.”

그 말들은 어느새

잔소리가 되었고,

나는 귀를 닫은 가족 곁에서

시끄러운 앵무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제 조금 알겠습니다.


말은,

상대가 나를 믿고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단 한마디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요.

이 깨달음을 얻기까지,

참 오래 걸렸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고,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이라도 공부하라”


스승의 그 말씀,

이제야 마음에 새겨집니다.


텅 빈 수레처럼 요란하던 시절을 지나,

조금씩 나를 채우고,

때를 알아가며,

귀를 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노력 중입니다.


나를 채우지 않으면

옳고 그름의 분별도 흐려지고,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되거나,

뜻하지 않은 삶의 고통에 휘말려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 될지도 모르지요.


말(言)은 말(馬)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영혼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지요.

마음의 고삐를 쥐지 못하면, 말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내달리고,

삶의 방향은, 그 말의 걸음으로 드러납니다.


신념은 말의 등자(鐙子)가 되어

삶을 향해 흔들림 없이 달릴 수 있게 해 주지만,

그 신념을 놓치는 순간,

말은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어

결국엔 누군가의 마음을 상처로 짓밟고 맙니다.


허공을 맴돌다 사라진 기억들이

불현듯 가슴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갑니다.


습한 공기 속, 걸음이 괜히 더 무거워집니다.


비 옵니다.


소리가 사라지고

비가 조용히 말을 건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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