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필자의 정성이 담긴 밥상
“엄마, 내가 미역국 끓일게”
어제 하루, 커피를 과하게 마셔 잠을 설쳤더니 아침 기상이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 아들이 미역국을 끓이겠다고 하더군요.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감이 밀려왔습니다.
누운 채 분 단위로 아들의 동선을 체크했지요.
“고기 핏물은 뺐어?”, “아니”
“마늘은 넣었어?”, “아차차.”
아들의 실수가 귀여워 슬그머니 장난기가 동했습니다.
“굴비가 먹고 싶은데...”,
“으아, 시끄러워서 요리를 할 수가 없어”
간섭이 귀찮아진 아들이 방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온갖 음해(?)에도 꿋꿋이 요리를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더군요.
평생 주부로 살아온 나의 최애 음식은 남이 해주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침밥을 먹기 위해 달아난 입맛을 붙들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냉장고 밑반찬이 가장자리를 메우고 메인으로 미역국과 스팸구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분홍빛 스팸은 2열 종대로 각 잡고 누워 있었고 접시 한 귀퉁이엔 빨간 모자 쓴 조교처럼 케첩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지요. 마치 군대 연병장을 옮겨 놓은 듯한 모습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웃어야 할지 먹어야 할지...
군대 갔다 온 티를 이렇게 대놓고 낼 줄이야.
바랐던 굴비는 올라오지 않았지만, 이게 어디냐 싶어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미역국 한 술을 떴습니다. 세상 먹어보지 못한 경이로운 맛이 났습니다.
미역국에서 미역국 맛이 아닌 맛이 났습니다.
물 맛, 간장 맛, 미역 맛, 고기 맛, 마늘 맛... 각각의 순수한 재료 맛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이렇게 어우러지지 않게 끓이는 비법이 궁금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성과물이 꽤나 만족스러운지 쏟아지는 불평에도 끄떡하지 않고 맛나게 그릇을 비워냈습니다.
못생긴 국물을 먹다 문득, SNS에서 봤던 한 편의 쇼츠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은둔 청년들이 등장하는 우리 사회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짧은 영상이었지요.
“요즘에 청년, 중년 은둔이 그렇게 많다는데... 너나 네 친구들 보면 참 성실해... 정말 대단하다”
‘그깟 이백만 원 벌 바엔 안 하는 게 나아.’ 이런 말을 하며 방 안으로 숨어드는 친구들도 있다지요.
더 나은 조건, 더 좋은 대우를 바라다 성장의 시기를 놓쳐 버리는...
감사함이 올라왔습니다.
이른 나이에 정신적, 경제적으로 독립한 아들입니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갑니다.
아들의 친구들도 마찬가지.
공부도 일도, 각자의 방식대로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들이 참 기특하고 대견합니다.
요즘 들어 평범하게, 그리고 나답게 사는 삶이 얼마나 용기 있는 선택인지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속이거나 불의와 손을 잡기도 하는...
지금 세상에서 온전히 나를 지켜내며 사는 일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런데도 겁 없이 세상으로 뛰어들어 저리 밝게 살아주니 내가 받은 복 중에 아주 큰 복이구나 싶습니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머쓱해하던 아들은 묻지도 않은 친구들의 흑역사를 줄줄 털어놓았습니다.
“아냐, 애들 바보야. 저들끼리 바다에 놀러 갔다 단체로 휴대폰 수장시켜 버렸어. 할부금 그대로 남은 녀석도 있어. 바다가 멈춰있는 줄 아나, 노느라 밀물 들어오는 걸 몰랐대...”
내 보기엔 저나 친구들이나 도찐개찐입니다만... 참 해맑습니다.
이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욕심 많은 어른들이 난도질한 세상이지만, 아이들이 좀 더 자라 힘을 키우면 또 다른 세상으로 고쳐 살겠지요.
오늘 아침 나는 맛을 덜어내고 마음을 첨가한 고품격 아침상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 덕에 아들에게 물려줄 마음의 유산 하나가 늘었습니다.
“내 자리에서 내 일을 잘하는 것, 그게 최고의 실력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