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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노는양슨생 Jun 02. 2021

목발 너이녀석

분명히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

수술한 날 내게 목발을 쥐어주신 간호사분.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혼자서 휠체어를 타고 가야 하는데, 우선 휠체어를 내 침대 옆으로 가져오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저 휠체어를 끌고 못 오겠어요."

"보호자분 없어요?"

"네.. 내일 아침에 올 거예요."


남편은 어린이집에 다녀온 두 아이를 돌봐야 했기에 혼자 있어야 했다. 친절하신 간호사분이 갖다 주신 목발. 사용설명도 해주시고, 내 키에 딱 맞춰주셨다.


'고등학교 때 사용한 목발도 집에 있을 텐데...'


갑자기 목발을 사기가 아까워졌다. 당근 마켓을 검색했더니 목발이 거의 헐값에 팔리고 있었다.

'아.. 이걸 사면 훨씬 쌀 텐데...'


내 상태를 보러 와주신 간호산 분께 슬쩍 말을 건넸다.

"저기요.. 목발 혹시 내일 가져오면 그때 바꿔서 사용해도 될까요?"

"한번 사용하면 못 바꾸죠. 이거 안사면 화장실 어떻게 가려고요. 안 사실 거예요?"

"네.. 그럼 살게요..."


가격은 15,000원이었다. 나는 훨씬 비쌀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저렴한 가격에 잘 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 목발과 나는 처음 만났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와서, 화장실을 갈 때나 침대에 갈 때 항상 목발은 나와 함께 했다. 이게 짚고 걸어 다닐 때는 굉장히 유용한데, 사용하지 않을 때는 옆에 두면 꽤나 걸리적거린다. 그리고 왜 이렇게 잘 쓰러지는지. 매번 쿵쿵 소리를 내면 쓰러지는 목발을 아이들과 남편이 몇 번이나 주워줬는가.


달큰한 밀크티가 땡기는 오후였다. 야심 차게 사둔 밀크티 베이스(시럽)를 우유에 부우며, '밀크티 마시면서 책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다. 여유 있는 티타임을 계획한 나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쿵!!


오늘도 천덕꾸러기 목발이 쓰러졌다. 아이 참. 그런데 목발이 쓰러지면서 정성스럽게 타놓은 밀크티 컵을 와락 쓰러뜨렸다. '으앙~ 이제 막 책 읽으며 마시려고 했는데.' 와락 넘어진 밀크티는 냉장고 밑을 향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질 않더라.




 퇴원하고 집에 온 다음날, 혼자서 점심을 차려먹고 있었다.(그때는 파아란 통깁스를 하고 있었다.) 발 하나를 들고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서툰 손놀림으로 반찬통을 꺼내던 중 먹으려고 하지도 않았던 멸치통이 훅 하고 떨어졌다. 주방 바닥에 멸치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여기저기 떨어진 멸치처럼 점심도 혼자 못 차려먹는 내 처지가 처량했다. 이게 울 일인가 싶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 뒤로 남편은 나의 점심거리를 식탁 위에 꺼내 주고 갔다.


 그런데 밀크티가 넘실넘실 쏟아진 오늘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화도 안 났고, 짜증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멸치통이 쏟아진 날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되려 밀크티가 쏟아진 오늘 뒤처리가 더 힘들었다. 낑낑대며 수건을 꺼내와서 이리 닦고, 저리 닦고 끈끈해진 바닥을 물티슈로 여러 번 닦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나의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내 마음을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갖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마음일끼라고 그날의 핵심감정을 써보는 일기장을 매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상황-행동-바람을 차근히 적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짜증나" "화딱지나" 라는 감정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곰곰이 상황-행동-나의 바람을 적어보니 짜증나와 화남의 감정에는 서운해/섭섭해/황당해/속상해/얄미워 등이 뒤섞여 있었다. 


 멸치통이 쏟아진 날 나는 다리 다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속상해 죽겠는데, 혼자 밥도 못 차려 먹으니 분노가 올라왔었다. 

나의 바람은 밥을 혼자 차려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였는데 그게 안되니 눈물이 났던 거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혼자 밥 차려 먹는 게 서툴러도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것들이 있기에 비록 다리는 다쳤지만 집에서 푹 쉴 수 있는 특권을 누릴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나는 책 읽으면서 달큰한 밀크티가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깐 쏟아졌어도 다시 우유에 아끼는 밀크티 시럽을 넣고 한번 더 타 먹으면 나의 욕구가 채워지는 거니 속상해할 필요도, 눈물을 흘릴 필요도, 화낼 필요도 없었다.





 무릎뼈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왜 나한테! 이 시점에! 왜 이런 일 생겨!!'라고 엄청 속상해했었다. 그 이야기에 '분명히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나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얘기해 주신 분이 계셨다.


 항상 바쁘게 살아가는 나는 내 마음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었다.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짜증을 내고 화내기 일쑤였다. 내가 원하는 기본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할 틈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넘쳐나는 요즘, 마음일끼를 쓰며 내 하루를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빨간불이 들어왔을 때, 그때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는지, 나의 바람을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참 좋다. 나와 친해지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일까.


 내 옆에 세워놓은 내 두 번째 발인 목발. 또 쿵하고 쓰러진다. 자꾸만 쓰러져도 내 두 번째 발이니깐 너무 미워하진 말아야지. 천덕꾸러기 목발아, 나 다리 다 나을 때까지 내 옆에 착~ 붙어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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