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짐 -4-

단편소설 연재

by 지공

고요했다. 발바닥을 울리는 아스팔트의 굴곡도, 눈꺼풀 위를 이따금 덮치던 미광도 없었다. 지공은 기억을 깨워버린 적막이 조금은 미웠다. 하지만 답은 주지 않고 물음만 던지는 기억들도 야속했다. 괜히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활기찬 소란이 잠시 쉬고 있는 듯한 어둠이었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비닐봉지를 들이밀며 흔들었다. 지공이 받아 들자 남자가 운전석으로 성큼 올라앉았다. 차가 뒤흔들렸다.

“휴게소. 이제 한 시간이면 가겠는데?”

라디오 다이얼에 달린 시계를 보고 지공은 귀까지 다 화끈거렸다. 밤 운전대를 잡은 사람 옆에서 두 시간을 내리 자다니. 첫 휴게소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공은 더욱 창피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거나 마시라고? 이것도 좀 먹든지.”

건네받은 비닐봉지 속에는 음료수 캔이 한가득이었다. 다섯 사람이 마신다고 해도 과했다. 같은 게 단 하나도 없었지만 풀잎 맛 음료는 없었다. 남자는 딱 하나 있는 캔 커피를 뽑아 들고 이것이라고 부른 걸 수납 박스 위에 놓았다. 조금 뜯어진 구멍 사이로 열기가 새어 나왔다. 남자는 뜨거운지 아뜨뜨 하며 귀를 잡았다. 포장을 벗겨낸 플라스틱 접시에서 뽀얀 만두 예닐곱 알이 연신 김을 뿜었다. 남자가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고는 후후 했다. 지공도 하나 집어 들었다. 뜨거웠다.

“돌아가고 싶냐?”

만두를 호호 불다가 남자를 돌아봤다.

“계속 찾던데? 아부지 아부지 하면서.”

남자는 운전대를 돌리며 두 번째 만두를 입에 넣었다.

“왜 나온 거냐?”

만두를 씹으며 몇 시냐? 하는 것처럼 물었다. 지공은 손 위에서 알맞게 식은 만두를 내려다봤다.

“아무도 없어서요.”

“아무도?”

지공은 남자 대신 캔 커피의 뚜껑을 땄다. 남자가 피식 웃고는 한 모금 마셨다.

“네.”

만두를 입에 넣었다. 미지근했다.

“안 보여요. 언제부턴가 말예요.”

“뭐?”

지공은 고갤 돌려 창밖을 보았다. 모든 게 식은 것처럼 깜깜했다.

“아버지요. 그래서 찾으려고요.”

제 자리에 있을 게 분명한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서?”

“어디든요.”


지공은 그냥 두라는 남자의 말에도 주전부리 흔적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흔적들이 다 지워져도 조수석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창피함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다. 귀가 다시 뜨듯해지는 사이 트럭이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갔다. 남자의 까만 거북목이 뒤로 젖히며 풀어졌다. 겨우 한 치 앞만 보이는 까만 길 위에서 짐을 지고 달려야 하는 고단함. 익숙한 그것이 남자의 목덜미에도 스며 있었다. 그리고 지공은 그게 너무나도 오랜만이라 참 묘했다.

정돈되지 않은 샛길에 몸이 사방팔방으로 튕겼다. 중학생일 때만 해도 모든 차가 이렇게 흔들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언젠가 친구 아버지의 승용차를 얻어 탔을 때, 지공은 알게 됐다. 어떤 차는 자갈길 위에서도 태연하다는 걸. 그 후로 트럭은 유독 더 흔들렸다.

“그놈의 어디든에 내려주고 싶다만,”

몸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남자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이 동넨 창고밖에 없어. 물건만 부리고 더 나가서 내려 줄게.”

남자의 말에 밖을 살폈다. 의미도 없어 보이는 낡은 철제 대문 안쪽에는 창백한 램프 하나가 높게 서 있었고, 그 외로운 빛 아래로 나무 팔레트와 종이 상자 몇 개가 쌓여 있었다.

“차 안에서 기다려도 되고, 마려우면 밖에서 일 보고.”

남자가 빛 가리개를 젖혀 종이 뭉치와 펜을 꺼냈다.

“저도 도울게요.”

지공도 벨트를 풀었다.

“여긴 병원도 없다. 됐어.”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내렸다. 지공은 따라 내렸다.

“깡통에는 싸지 마라? 내 재떨이니까.”

남자가 얄궂게 웃었다.

“도울게요.”

지공은 다시 말했다.

“그거참.”

고집스레 남잘 쳐다봤다.

“그래 뭐.”

지공은 남자를 따라 짐칸으로 갔다.


골반을 약간 넘는 정도의 상자였다. 짐들은 두세 개씩 바닥에 넓게 쌓여 있었고 돌돌 말린 두툼한 매트가 짐들이 메우지 못한 빈 틈을 대신 메웠다. 잘 짜인 짐들이 꼭 바둑판처럼 고상해 보였다.

“밖에 빠레뜨로. 근데 들 수 있겠냐?”

지공은 짐 앞에 섰다. 들어 올릴 각도가 영 떠오르질 않았고, 들더라도 눈앞을 가릴 크기였다. 몸 앞으로 들어 올리라고 만든 짐은 아니구나. 지공은 생각했다. 위아래로 쌓인 짐 두 개를 밀어 짐칸 끄트머리로 옮겼다. 짐칸에서 내려와 등에 천천히 업어 들었다. 몇 발짝 휘청거리긴 했지만 이내 적응했다. 성큼성큼 남자가 말한 나무 팔레트 위로 짐을 내려놓았다.

“얼레?”

남자의 눈길에도 지공은 그저 다음 짐을 밀었다.


점점 바닥이 보였다. 하얀 교복 블라우스의 겨드랑이가 조금 축축했다. 시렸던 바람이 조금은 친근하게 불어와 땀을 말렸다. 안쪽으로 가 몇 남지 않은 상자를 끌어당기는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 상자가 끌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지공은 잠시 멈췄다. 빛을 모으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구석에서 자그마한 점 두 개가 반짝거렸다. 짐칸으로 들어선 남자가 그런 지공을 빤히 봤다. 지공은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남자가 뭔데? 하며 점퍼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비췄다. 그러자 또 소리가 났다. 종이상자가 부드럽게 사각거렸고 철제 바닥은 일정하게 바삭거렸다. 느닷없는 파란 고양이에게서는 걷는 소리가 났다.

“뭐냐?”

남자가 물었다. 지공은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고양이에게 묻는 것인지를 몰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매몰차게 가버리더니 역시 따라온 거라고, 지공은 명치 부근이 조금 말랑거렸다.


“처음 아니지? 폼이 보이던데.”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뻐끔댔다.

“네. 아버지도 짐꾼이셨거든요.”

지공의 눈이 닿은 곳에서는 고양이가 벌레 그림자를 잡으려 요리조리 뜀박질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직도 파랬다. 남자가 새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지공이 트럭의 텅 빈 짐칸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돕는 걸 참 싫어하셨어요. 아버지보다 키가 더 자랐을 때도요.”

눈앞으로 담배 연기가 스멀스멀 지나갔다. 듣고 있다는 뜻 같았다.

“몰랐어요. 왜 그러시는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그림자에 흥미를 잃은 고양이가 엎드려 앞발을 핥아댔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지공에게 눈을 맞췄다.

“지금은 알 것도 같아요.”

“그래?”

“힘이 드셨던 거 아닐까요. 사는 게 짐인데, 짐을 나르면서 산다는 게. 그리고 저도 그리될 거 같다는 게 말예요.”

“묻는 거냐?”

“글쎄요.”

담뱃불을 튕기는 남자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버질 찾으면 뭘 할 건데?”

“물어보려고요.”

“무얼?”

“글쎄요. 이것저것요.”

두루뭉술한 대답 때문인지 남자가 또 피식거리며 담뱃갑을 열었다. 남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담뱃갑을 구겨서 버렸다. 지공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아버지의 담뱃갑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지공을 반히 봤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트럭으로 걸어갔다. 뒷모습이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달라는 것인지, 나중에 피우라는 것인지 지공은 이해할 수 없었다. 담뱃갑을 도로 집어넣고 지공도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 힐끗 보니 고양이도 주뼛거리며 뒤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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