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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죽은 잘못이 없는데

by 초이

비행으로 사흘간 집을 비울 예정이었다. 출발 전날 한인마트에서 불고깃감을 잔뜩 사 왔다. 달콤 짭짤하게 양념을 하고 양파를 넉넉히 썰어 넣은 채, 두 덩어리는 냉동실에 나머지 한 덩이는 냉장고에 넣어뒀다. 출발하는 날은 소고기뭇국을 끓였다. 나가기 전, 하루 한 끼는 집밥을 꼭 챙겨 먹으라 신신당부하며 집을 나선다. 동생 세명은 모두 요리를 할 줄 안다. 도시락도 잘 싸서 다닌다. 하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피곤하고 귀찮은 날엔 쌀을 씻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밥도, 꺼내서 데우기만 하면 되는 불고기도 버겁게 느껴진다. 그걸 알기에 거듭 잔소리를 하게 된다.


사흘 후 집에 도착했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시간, 다들 잠든 것 같아 조용히 현관문을 닫는다. 주방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한쪽 구석에 자리한 박스가 눈에 띈다. 차고에 있는 분리수거함까지 가기 번거로워 임시로 모아둔 재활용 쓰레기였다. 슬쩍 보니 참치 캔, 보바 컵, 각종 전단지들이 들어있다.


그리고 가장 맨 위에 얹혀있는 전복죽 플라스틱 용기가 눈에 띈다. ’이건 정말 먹을 게 없을 때 비상식량으로 먹어‘하며 식구수에 맞춰 사뒀던 인스턴트 죽이었다. 정말 배가 고파 밥 차릴 힘이 없었거나, 시간이 없었거나, 귀찮았거나, 그도 아니면 단순히 그 죽이 먹고 싶었을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그럴 때 먹으라고 산거였다. 막상 그 죽을 먹은 동생은 별생각 없이 죽을 꺼내 먹었으리라.


그럼에도 머릿속으로 그려본 시나리오 속 동생 모습이 짠해 - 학교에 알바까지, 피곤하고 배고픈 채로 집에 왔는데 먹을 게 없어 간신히 죽을 꺼내먹은 - 괜히 인스턴트 죽이 원망스럽다. 내일은 건강한 도시락을 싸서 들려 보내야지, 장 봐와서 집밥도 해 먹고, 반찬도 몇 가지 만들어 놔야지하며 샤워를 한다. 고된 몸을 침대에 뉘자, 몸이 꿈나라로 빨려 들어가듯 잠이 쏟아진다. 열심히 일 하고 온 나에게 늦잠을 선물해야지. 꿈나라 입성 직전, 간신히 핸드폰을 붙들고 알람이 꺼졌나 확인한다. ‘내일까진 알아서들 도시락 싸가라…’ 닿지 않는 마음의 소리를 되뇌며 하루를 마감한다.


모두 나갔을 시간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집안이 고요하다. 뚜껑이 닫힌 프라이팬 속엔 계란볶음밥이 만들어져 있었고, 냉장고엔 과일과 두부가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시락을 내가 홀랑 먹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볶음밥 먹어도 되냐고 동생들 단톡방에 물어봤다. 언니 먹으라고 남겨둔 거란 답이 온다. 밥을 데워 소파에 앉으니, 쇼파 테이블 위로 개켜둔 수건과 옷가지가 쌓여있다. 그제야 열심히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내가 키운 건 아니지만 동생 키운 보람과 뿌듯함에 혼자 감격하는 오후다.


식사 후, 벅찬 마음을 유지한 채 비장하게 머리를 질끈 묶는다.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속 식재료를 확인하고는 밑반찬으로 감자볶음과 진미채볶음 그리고 저녁식사로 함께 먹을 된장찌개가 가능하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바쁘게 움직여 요리를 마치고 동생들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문득 엄마처럼 내가 가족의 저녁을 챙기고 있단걸 깨달았다.


‘오늘 집에서 저녁 먹을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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