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 다녀온 다음 날,
휴무라 오전은 밀린 잠으로 채우고 오후 느지막이 요리하러 주방으로 내려갔다.
여러 가지 메뉴를 고민하던 중, 동생들과 건강한 집밥 한 끼 먹어야겠다 싶어 포스트잇에 된장국 재료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재료가 있나 오랜만에 냉장고를 열어봤다. 위 두 선반은 밑반찬 및 김치, 중간에 위치한 서랍 오른쪽은 과일칸, 왼쪽은 야채칸, 맨 아래 긴 선반은 유제품 및 육류… 엄마가 나름 정해놓은 규칙이 어느새 흐트러져 있다. 외식하고 포장해 온 남은 음식이 곳곳에 들어차있고, 반쪽 혹은 사분의 일쪽만 쓰고 넣어둔 양파가 세 개나 있었다. 된장국 재료에 필요한 애호박을 찾다가, 키친타월에 덮인 채 지퍼백에 들어가 있는 불길한 덩어리가 서랍 구석에서 발견됐다. 열어보니 애호박 반쪽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괜히 긴장한 마음을 쓸어내리고 ‘애호박’하고 포스트잇에 적는다.
애호박을 포함해 같이 넣고 끓일 감자와 양배추, 두부 등을 적고 마트에 다녀왔다. 사온 야채들을 바로 정리해 넣으려는데, 내 머리 사이즈에 1.5배는 족히 넘는 양배추가 도무지 들어갈 생각을 안 한다. 안 되겠다 싶어 미래의 나에게 미뤄뒀던 냉장고 정리를 결심한다. 가장 먼저 애매하게 남아서 버리지도, 그렇다고 먹지도 않는 포장해 온 음식들을 몽땅 꺼냈다. 정체가 불분명한 내용물이 담긴 반찬통들도 다 꺼냈다. 두부 반모가 혼탁하게 변해버린 물에 반쯤 잠겨 상해 가고 있었다. 지난주 도시락으로 싸갔다 절반이 남아 버리기 아깝다는 마음에 냉장고에 넣어뒀던 볶음밥도 꺼낸다. 랩으로 위를 덮어둔 국그릇도 꺼낸다. 랩에 이슬이 잔뜩 맺혀 뭐가 담겼나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난 무슨 반찬인지 추적이 불가해 랩을 열어보니 고약한 냄새와 함께 곰팡이핀 카레가 등장한다. 무려 엄마가 가기 전 해 먹고 남은 카레였다. 오늘의 퀘스트 난이도 무려 별 다섯 개짜리 곰팡이 핀 음식 처리다.
유학시절 언니와 둘이 살았을 때도, 반년 가랑 원룸에서 자취했을 때도 냉장고 관리가 참 어려웠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냉장고 속 식재료 및 반찬 재고관리가 어려웠다. 얻어온 반찬은 먹을 사람이 없어 대부분 냉장고 속에서 외롭게 상해갔고, 큰맘 먹고 요리하려고 사온 식재료들은 많아야 절반 혹은 삼분의 일가량 사용되고 한참 뒤 결국 버려졌다. 그때 당시, 곰팡이가 낀 무말랭이가 담겨있던 반찬통을 닦을 자신이 없어 통째 버렸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국그릇을 버릴 순 없는 노릇, 두부가 담긴 반찬통도 트라이탄 소재로 튼튼하고 사이즈가 적당해 도시락통으로 종종 사용하는 매우 아끼는 용기였다.
냉장고에 무언가 넣을 땐 신중해야겠다.
안 먹을 것 같으면 아까워도 바로 버려야겠다.
도시락통 바로바로 꺼내 설거지해야겠다.
등등의 다짐을 하면서 고무장갑을 비장하게 낀다.
그리고 동생들에게 무게를 잔뜩 잡고 카톡한다.
‘앞으로 각자 포장해온 음식은 각자 책임지고 처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