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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Aug 09. 2019

'의' 남용은 일본어 잔재

한국어에는 조사가 있다. 조사는 체언 뒤에 붙는데 조사가 붙은 말과 다른 말의 관계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조사가 바르게 쓰여야 문장이 문법적으로 완전해지면서 문장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조사가 잘못 사용되면 문장의 문법성이 어그러지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 그만큼 조사 사용은 중요하다. 우리 민법은 처음 만들 때 일본 민법을 거의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다 보니 일본어 어투를 직역하다시피한 게 사실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민법 개정이 있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조항은 제정 당시 그대로이고 조사 사용 역시 일본어식 용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민법 제29조를 보자.


제29조(실종선고의 취소) ①실종자 생존한 사실 또는 전조의 규정과 상이한 때에 사망한 사실의 증명이 있으면 법원은 본인, 이해관계인 또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취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실종선고후 그 취소전에 선의로 한 행위의 효력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실종자의 생존한 사실'이라고 했는데 이는 마치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가사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연상케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 동요는 한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익숙한 노래다. 그래서 '나의 살던 고향은'에 대해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의문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고향이 봄'이라는 노래를 벗어나면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표현을 쓸 사람은 없다. '내가 살던 고향은'이라고 한다. '실종자의 생존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민법 조문 안에 '실종자의 생존한 사실'이 남아 있지만 일상 생활에서는 '실종자가 생존한 사실'이나 '실종자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 등과 같이 말한다. '실종자 생존한 사실'은 오늘날의 언어습관과는 아주 동떨어진 낡은 투의 표현이요 일본어 잔재이다. 하루 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종자 생존한 사실'은 아래에서처럼 '실종자 생존한 사실'로 고쳐야 한다.


제29조(실종선고의 취소) ①실종자 생존한 사실 또는 전조의 규정과 상이한 때에 사망한 사실의 증명이 있으면 법원은 본인, 이해관계인 또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취소하여야 한다. 


민법 제91조에 있는 '존속기간 불확정한 채권 기타 가액 불확정한 채권'도 마찬가지다.


제91조(채권변제의 특례) 

②전항의 경우에는 조건있는 채권, 존속기간 불확정한 채권 기타 가액 불확정한 채권에 관하여는 법원이 선임한 감정인의 평가에 의하여 변제하여야 한다.


이 역시 '존속기간 불확정한 채권, 기타 가액 불확정한 채권' 또는 한걸음 나아가 '존속기간이 확정되지 않은 채권, 기타 가액이 확정되지 않은 채권'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제91조(채권변제의 특례) 

②전항의 경우에는 조건있는 채권, 존속기간 불확정한 채권, 기타 가액 불확정한 채권에 관하여는 법원이 선임한 감정인의 평가에 의하여 변제하여야 한다.


같은 문제는 민법 제227조에서도 발견된다.


제227조(유수용공작물의 사용권) ①토지소유자는 그 소유지의 물을 소통하기 위하여 이웃 토지소유자 시설한 공작물을 사용할 수 있다.


'이웃 토지소유자 시설한 공작물을'이라고 했는데 아래에서처럼 '이웃 토지소유자 시설한 공작물을'이라야 한다. '이웃 토지소유자의 시설한 공작물을'과 같은 일본어식 표현이 민법에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건만 이 괴상한 어투의 표현은 60년째 요지부동으로 남아 있다. 언제 한국어다운 표현으로 바뀔까.


제227조(유수용공작물의 사용권) ①토지소유자는 그 소유지의 물을 소통하기 위하여 이웃 토지소유자 시설한 공작물을 사용할 수 있다.




'~의 책임있는 사유로 인하여'는 민법에 여러 번 나오는 문구다. 법조계에서는 그동안 의례히 써왔고 그래서 익숙해졌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이 아니다. 


제362조(저당물의 보충) 저당권설정자의 책임있는 사유로 인하여 저당물의 가액이 현저히 감소된 때에는 저당권자는 저당권설정자에 대하여 그 원상회복 또는 상당한 담보제공을 청구할 수 있다.


'저당권설정자의 책임있는 사유'라고 했는데 '저당권설정자의 사유'는 말이 잘 안 된다. '영희의 사유', '철수의 사유' 등과 같은 '아무개의 사유'는 어색하다. 거기에 '책임있는'이 더 붙어 '저당권설정자의 책임있는 사유'가 된다고 해서 어색함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법자의 의도는 분명히 '그 책임이 저당권설정자에게 있는 사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당권설정자에게 책임이 있는 사유'라고 해야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현이 된다. 그렇게 해야 일상적인 한국어와도 부합한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어떤 일의 책임 누구에게 있는지를 늘 따지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당권설정자의 책임있는 사유'는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저당권설정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고쳐 쓸 때 뜻이 분명해지면서 한국어다운 표현이 된다. '저당권설정자의 책임있는 사유'는 어설프고 어색한 표현인데 법률 조문이 이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 


제362조(저당물의 보충) 저당권설정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인하여 저당물의 가액이 현저히 감소된 때에는 저당권자는 저당권설정자에 대하여 그 원상회복 또는 상당한 담보제공을 청구할 수 있다.


민법 제202조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다. 제202조는 다음과 같다.


제202조(점유자의 회복자에 대한 책임) 점유물이 점유자의 책임있는 사유 인하여 멸실 또는 훼손한 때에는 악의의 점유자는 그 손해의 전부를 배상하여야 하며 선의의 점유자는 이익이 현존하는 한도에서 배상하여야 한다. 소유의 의사가 없는 점유자는 선의인 경우에도 손해의 전부를 배상하여야 한다.


'점유자의 책임있는 사유'는 '점유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고쳐 쓸 때 편하게 읽히고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제202조(점유자의 회복자에 대한 책임) 점유물이 점유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 인하여 멸실하거나 훼손된 때에는 악의의 점유자는 그 손해의 전부를 배상하여야 하며 선의의 점유자는 이익이 현존하는 한도에서 배상하여야 한다.


그밖에도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는데 모두 '~에게 책임 없는', '~에게 책임 있는'으로 바꿀 때 뜻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즉 ''를 '에게'로 바꾸고 '책임'은 '책임'로 바꾸어야 한다. (고친 후의 문장을 일일이 보이지 않았다.)


제537조(채무자위험부담주의) 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당사자쌍방 책임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하지 못한다.


제538조(채권자귀책사유로 인한 이행불능) ①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채권자 책임있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할 수 있다. 채권자의 수령지체 중에 당사자쌍방 책임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도 같다.


제546조(이행불능과 해제) 채무자 책임있는 사유로 이행이 불능하게 된 때에는 채권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제686조(수임인의 보수청구권) 

③수임인이 위임사무를 처리하는 중에 수임인 책임없는 사유로 인하여 위임이 종료된 때에는 수임인은 이미 처리한 사무의 비율에 따른 보수를 청구할 수 있다.


제729조(채무자귀책사유로 인한 사망과 채권존속선고) ①사망이 정기금채무자 책임있는 사유로 인한 때에는 법원은 정기금채권자 또는 그 상속인의 청구에 의하여 상당한 기간 채권의 존속을 선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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