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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중 Sep 19. 2019

모호한 의미

법률, 특히 민법은 일반인에게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은 19세로 성년에 이르게 된다.'(제4조)나 '법인은 이사를 두어야 한다.'(제57조), '변제자는 변제를 받는 자에게 영수증을 청구할 수 있다.'(제474조)와 같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조문도 있지만 '양도인이 채무자에게 채권양도를 통지한 때에는 아직 양도하지 아니하였거나 그 양도가 무효인 경우에도 선의인 채무자는 양수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유로 양도인에게 대항할 수 있다.'(452조)와 같은 조문은 법률 문외한인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불가능에 가깝다. '양도인', '채무자', '채권양도', '선의', '대항할' 등과 같은 용어 자체가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민법은 제4조, 제57조, 제452조처럼 이해하기 쉬운 조문은 소수이고 대부분은 어렵다. 따라서 민법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쉬웠으면 하고 바라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무리다. 법이 어려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려울 까닭이 전혀 없는 경우에까지 어렵게 표현되어 있다면 이는 잘못이니 바로잡아야 한다. 민법에는 간혹 뚜렷한 이유 없이 표현이 어색하여 이해를 가로막는 사례가 있다. 한 예로 제442조를 보자.


제442조(수탁보증인의 사전구상권) ①주채무자의 부탁으로 보증인이 된 자는 다음 각호의 경우에 주채무자에 대하여 미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1. 보증인이 과실없이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을 받은 때


주채무자의 부탁을 받아서 보증인이 된 사람은 네 가지 경우에 한해서 사전에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제442조는 규정하고 있다. 네 가지 중 첫째 경우가 '보증인이 과실없이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을 받은 때'이다. 여기서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이란 구절이 문제다. 1958년 민법이 제정될 때 들어 있었던 문구인데 지금껏 그대로이다.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은 '재판이 채권자에게 변제하다'에서 도출된 구문이다. 그런데 재판이 채권자에게 변제할 수는 없다. 변제의 주체는 사람인 채무자이지 재판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은 말이 안 된다. 그렇게 표현해도 법조인들 사이에서는 뜻이 통할지 모르겠으나 한국어 문장으로서 기본을 갖추지 못하였다. 만일 '채권자에게 변제하라는 재판을 받은 때' 또는 더 나아가 '채권자에게 변제하라는 판결을 받은 때'나 '채권자에게 변제하라는 재판 판결을 받은 때'라고 했다면 문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누구나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채권자에게 변제할 재판'은 어렴풋이 입법 의도는 짐작이 되지만 구문 자체가 바르지 않아 이해를 어렵게 한다. 반듯하게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제442조(수탁보증인의 사전구상권) ①주채무자의 부탁으로 보증인이 된 자는 다음 각호의 경우에 주채무자에 대하여 미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1. 보증인이 과실없이 채권자에게 변제하라는 재판을 받은 때


제442조(수탁보증인의 사전구상권) ①주채무자의 부탁으로 보증인이 된 자는 다음 각호의 경우에 주채무자에 대하여 미리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다.

1. 보증인이 과실없이 채권자에게 변제하라는 판결을 받은 때




민법 제708조는 조합에 관한 조항인데 업무집행자인 조합원은 정당한 사유 없이 스스로 사임할 수 없고 해임의 경우에도 나머지 조합원이 모두 해임에 동의할 때에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뜻을 담은 조문의 표현이 모호하다. 


제708조(업무집행자의 사임, 해임) 업무집행자인 조합원은 정당한 사유없이 사임하지 못하며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면 해임하지 못한다.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면 해임하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서 '아니면'이라는 말이 쓰였는데 '아니다'는 '나는 부자가 아니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주어) ~이(보어) 아니다'나 '~은(주어) ~이(보어) 아니다'처럼 쓰인다. 즉 주어도 있어야 하고 보어도 있어야 하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면'에는 보어만 있고 주어가 없다. '무엇이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라는 것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읽는 사람에게 생략된 주어를 채워 넣어서 이해하라는 건데 어떤 말이 생략되었는지 쉽게 알 수 없다. '해임 결정이 다른 조합원의 일치가 아니면'처럼 '해임 결정이' 같은 말이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독자에게 부담을 줄 필요가 없다. 생략된 성분 없이 표현하면 뜻이 명확해진다. '다른 조합원이 일치하지 않으면' 또는 '다른 조합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이라고 하면 한눈에 뜻이 분명하게 이해된다. 가장 명확해야 할 법조문에서 모호한 표현이 있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이 조항도 1958년 제정 당시 조문 그대로인데 잘못이 있으면 고쳐야지 제정할 때부터 있었다는 이유로 가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


제708조(업무집행자의 사임, 해임) 업무집행자인 조합원은 정당한 사유없이 사임하지 못하며 다른 조합원이 일치하지 않으면 해임하지 못한다.




법조문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려면 빠진 부분이 없어야 한다. 있어야 할 게 없으면 무슨 뜻인지 모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다음의 민법 제1106조도 한번에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 어려운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있어야 할 말이 없어서 모호하게 느껴진다.


제1106조(유언집행자의 해임) 지정 또는 선임에 의한 유언집행자에 그 임무를 해태하거나 적당하지 아니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법원은 상속인 기타 이해관계인의 청구에 의하여 유언집행자를 해임할 수 있다.


이 조항은 법원이 유언집행자를 해임할 수 있는 경우를 두 가지 들고 있다. 첫째는 유언집행자가 그 임무를 해태하는 경우다. 자기 임무를 게을리하는 유언집행자를 해임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둘째는 '유언집행자가 적당하지 아니한' 경우인데 이것이 문제다. '적당하다'는 형용사다. 그런데 예컨대 '유능하다'나 '성실하다'도 형용사지만 '유능하다'나 '성실하다'는 아무런 보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 사람은 유능하다', '그 아이는 성실하다'와 같이 말해도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된다. 그러나 '적당하다'는 다르다. 국어사전에 '적당하다'는 다음과 같이 뜻풀이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적당하다「형용사」

「1」 …에/에게】【-기에 정도에 알맞다.  

주차에 적당한 공간.

자신에게 적당한 일을 찾다.

짝을 잃은 한국군 군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적당한 가격으로 넘길 것이었다.≪이상문, 황색인≫


즉, '…에/에게】【-기에'와 같은 보어가 필요하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냥 '적당한 공간'이 아니라 '주차에 적당한 공간'이라고 할 때 뜻이 명확해지듯이 '유언집행자가 적당하지 아니한' 경우가 아니라 '유언집행자가 유언집행자로서 적당하지 아니한' 경우라고 할 때 뜻이 분명해진다. 비록 국어사전에 보어로 '~로서'가 필요하다고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는 국어사전이 치밀하지 못한 경우다. 요컨대 '적당하다'는 보어와 함께 쓰일 때 뜻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민법 제1106조는 '유언집행자로서 적당하지 아니한'이라고 할 때 뜻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제1106조(유언집행자의 해임) 지정 또는 선임에 의한 유언집행자에 그 임무를 해태하거나 유언집행자로서 적당하지 아니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법원은 상속인 기타 이해관계인의 청구에 의하여 유언집행자를 해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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